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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오랜 팬이 쓰는, 파트릭 모디아노를 위한 변명

  • 등록일2014.10.27
  • 조회 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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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트릭 모디아노 팬 인증샷
올해 노벨문학상을  파트릭 모디아노가 받게 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15년 넘게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파트릭 모디아노를 꼽고 있는,  국내 출간된 그의 책들을 거의 다 구입해서 읽은,  정말 정말 오랜 열혈 독자거든요.
 
오랫동안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들을 좋아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얘기를 잘 하지 않았습니다. 얘기를 해도 잘 모르더군요. “그게 누구야?”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죠. 파트릭 모디아노를 좋아한다는 사람은 이날 이때껏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진짜로요.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저 혼자 몰래 좋아하던 작가가 인정 받았다는 것에 대한 감격(사실 프랑스에서는 이미 인정받고 있는 작가지만 말이죠)도 있었지만 사실 저는 얼떨떨했어요. 음… 저는 사실 파트릭 모디아노 작품들이 대중적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작품성이 높은 위대한 문학작품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다만 아름다웠죠.  
 
그래서 그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자, 오랜 팬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답니다. 파트릭 모디아노를 몰랐던 독자가 그의 대표작 한 권을 읽고 나서는, “뭐야? 노벨상 받았다는데 별로 잖아?”라고 할까봐요. 게다가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오해받기 딱 좋거든요. 그래서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을 처음 읽는 독자들을 위해 매력포인트를 짚어줘야겠다, 생각하게 되었어요. , 이건 순전히 팬심의 발로입니다. 우리 작가님을 오해하지 말아 주시고, 잘 부각되진 않지만 섬세한 매력 포인트를 발견해주세요.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어느 파트릭 모디아노의 오랜 독자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의 대표작이라면 공쿠르상 수상작인『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꼽을 수 있는데요. 기억을 잃어버린 퇴역 탐정이 자신의 과거를 찾아 헤매다 만나는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들이 소설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뜬구름 잡는 식의 단서들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주인공의 과거는 조금씩 형태를 갖춰 가지만, 그렇게 밝혀지는 그의 과거는, 태생부터가 그림자처럼 느껴집니다. 그는 가짜 여권을 가지고 있었고, 몇 개의 가명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뚜렷한 주거지도 없이 호텔 또는 친구들의 집을 전전했습니다. 드니즈라는 여자를 사랑했던 것 같지만 그 감정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정체를 가장 잘 알 것 같은 결정적 인물을 찾게 되지만 그는 비밀을 간직한 채 깊고 깊은 태평양 아래로 사라져버린 후이지요.   
 
아마 어떤 독자들은 파트릭 모디아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무드에 사로잡혀서 이 한 권의 책으로 파트릭 모디아노의 팬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제가 그랬죠. 하지만 또 어떤 독자들에게는 ‘이게 뭐야! 이렇게 끝나는게 어딨어!’라는 분노을 일으킬 겁니다. 제 주변에 있었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파트릭 모디아노 특유의 무드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조금만 더 기회를 가져보시면 어떨까 싶어요. 천천히 읽으시면 분명 그게 무언지 알게 될 거에요.
 
일생 동안 단 한 권의 책을 완성하려는 작가
 
하지만 파트릭 모디아노 특유의 무드에 이끌려 그의 책을 한 권, 두 권 읽다보면 또 한 번 의심의 순간이 찾아올 겁니다. 이 책이나 저 책이나… 다 비슷한 줄거리, 비슷한 분위기, 비슷한 인물들의 반복이거든요. 잠깐 예를 들어볼까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기억을 잃어버린 퇴역 탐정이 자신의 과거를 찾아 다니다 독일 점령기의 프랑스에서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던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도라 브루더』
우연히 1941년에 발행된 신문에서 ‘15살의 소녀 도라 브루더'를 찾는 기사를 본 작가가 독일의 프랑스 점령기에 사라진 유대인 소녀에 관한 기억들, 단편적인 정보들을 찾아 헤맨다.  
 
『한밤의 사고』
성년이 될 무렵의 ‘나’는 차에 치여 쓰러지고, 여자 운전지와 같이 병원에 실려간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 여자는 사라졌고, 그녀에게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낀 나는 그녀를 찾아 한 밤의 파리를 헤매고 우연히 아버지와의 기억도 되살리게 된다.
 
『작은 보석』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주인공 테레즈는, 지하철 통로에서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엄마와 똑같이 생긴 여인을 보고, 그녀가 사는 곳을 방문하면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빠져든다.
 
『신원 미상 여자』
10대 후반에서 성인이 될 찰나의 세 여자를 주인공으로,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그리고 자신 스스로의 기억에서도 지워버렸을 청춘의 짧은 시간들을 담고 있다. 결국,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신원 미상 여자'로 밖에 남지 않을 여자들의 삶.
 
『슬픈 빌라』
‘빅토르 슈마라 백작'이라 스스로를 칭하는 무국적자인 ‘나'가 십여 년 전의 청춘시절을 회상한다. 형체 없는 불안에 파리를 떠나 스위스 근처 국경지대에 머물던 나는 그곳에서 이본느, 맹트와 어울려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을 망각 속으로 떠내려 보낸다.
 
, 이쯤되면 작가의 집착에 살짝 무서워질 지경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한결같이 똑같은 이야기들을 주구장창 쓸 수 있는 거죠? 어찌보면, 파트릭 모디아노는 일생 동안 단 한 권의 책을 완성하고자 하는 작가인 것 같아요. 조금씩 변주되고 있지만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짙은 안개같은 망각을 뚫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곳에 찾은 것은 여전히 짙은 안개 한 덩이뿐이라는 거죠.
 
“나는 혈통 있는 척하는 한 마리의 개다"
 
파트릭 모디아노가 늘 똑같은 이야기들을 줄기차게 쓰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그가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드러낸 자전적 이야기 『혈통』을 읽으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왜 소설을 쓸 수 밖에 없는지, 왜 일생 동안 단 한 권의 소설을 쓸 수 밖에 없었는지 말이죠.
 
점령기 프랑스에서 여러 가지 가명을 사용하며 수상쩍은 사업을 하던 아버지. 벨기에 출신의 무명 배우로 늘 여기저기 공연을 떠나 있었던, 너무나 무심하고 냉랭하여 기르던 개가 창 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을 했을 정도였던 어머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들의 삶에 모디아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늘 어딘가의 기숙학교에 홀로 남겨져야 했습니다.
 
“나는 혈통 있는 척하는 한 마리의 개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떤 뚜렷한 계층에 속하지 않았다. 너무나 파란만장하고 불확실해서 마치 반쯤 지워진 글자들로 신분증명서나 행정서식을 채우려 애쓰는 것처럼, 나는 이 흐르는 모래 속에서 몇 가지 흔적이나 몇 가지 표지를 찾으려 노력 해야 한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이 책에서 그가 추적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 그의 기억 속에 조각조각 남아있는 어린 시절들을 담담하게 써내려갑니다. 오랜 도피 생활에 지친 범죄자가 제 발로 경찰서를 찾아가 조서를 쓰듯 말이죠.
 
“말이 엉킨다 해도 내 잘못이 아니다. 빨리 이야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그럴 용기가 나지 않을 것이다.
 
그가 털어놓는 이야기는, 그의 소설과 참 많이도 닮아 있습니다. 그의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여러 고유명사와 모티브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 수 있고요. 무엇보다도, 그가 왜 소설을 쓰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사소한 사건들이 이어지고 당신에게 많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스쳐 지나간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진정한 삶을 살 수 없으며, 아무도 모르게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 기만의 삶으로부터 몇몇 단편적인 조각들이 내게 되살아온다."
 
희미한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인생에서 소외된 느낌을 극복하기 위해, 사라져가는 기억 속 이름 하나, 에피소드 하나를 그러 모아 소설로 쓸 수 밖에 없었던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는 프랑스에서도 언론에 모습을 잘 나타내지 않는 작가라고 합니다. 언젠가 TV 프로그램에 한 번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놀라울 정도로 말이 어눌해서 신선한 충격을 줬다고 하네요. 이번에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에 대해서도, “기쁘지만 수상한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는데 정말 파트릭 모디아노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들이 많이 번역된 편이긴 하지만,  그의 매력을 잘 알 수 있는 몇 몇 작품들은 절판 상태라 좀 안타까운데요.  모디아노적 문학 세계의 시작과도 같은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살인사건이라는 소재로 좀 더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잃어버린 거리』, ‘남십자성'이라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목에 걸고 사라진 여인의 미스터리와 반전이 매력적인 『팔월의 일요일들』같은 소설들은 강력하게 다시 출간되기를 바랍니다.

 
| 박수진 (교보문고 북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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