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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이웃』허지웅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 우리 모두는 이웃”

  • 2022.10.04
  • 조회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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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홀로존재해야 했다. 하지만 정말 우리는 혼자였을까? 제 앞가림은 자기가 해야 하는 각자도생의 시대라지만, 그 모든 것이 모두 내가잘 해서, 또는 잘못해서 생긴 일들일까?
허지웅의 작가의 산문집 『최소한의 이웃』은 팬데믹 시대를 통과하며 우리가 시야에서 놓치고 있던 존재, 지금 여기 공동체의 이웃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늘 이웃과 함께 있었고,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때 오늘 하루가 덜 따갑게, 더 부드럽게 다가올 수 있다고 말이다.
다음은 허지웅 작가와의 서면 인터뷰.
 
 
LESS_김영사 제공
 
이번 책 『최소한의 이웃』 은 팬데믹을 통과하며 쓴 글들을 모았는데요
책 앞부분 <작가의 말>에 쓰신 것처럼, 팬데믹 시작할 때 즈음에는 약간의 희망이 있었던 것 같아요. 팬데믹이라는 전례 없는 상황 속에서, 그래도 우리 사회가, 개인이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배운 것이 1이라면, 악화된 것은 99인 것만 같아서 마음이 무겁고 어두워요. 팬데믹을 통과하면서 작가님의 마음, 생각에도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팬데믹 기간을 통과하며 우리 모두 타인 혹은 집단의 부주의와 이기심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겪는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동떨어져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싫든 좋든 긴밀하게 연결된 운명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팬데믹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함께 배울 만한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열정이 자연스레 공동체 의식으로 옮겨갈 거라 예상했습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같은 풍경을 보고 그러므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가 아니라 그러므로 주변에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미리 구별하고 배제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치달은 것 같습니다. 아쉽고 슬펐습니다.
 
 
제목이『최소한의 이웃』입니다. 거리두기와 자가격리의 시대에 '이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앞선 문제의식이 들자마자 다음 책에서는 이웃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어에도 생로병사가 있습니다. 어느 날 생성되어 쓰임이 생겼다가 잊혀지기도 하고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인 의미임에도 정치나 범죄에 연루되어 오염되기도 합니다. 그러다 폐기되기도 하지요.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이웃이라는 단어는 아마도 황혼에 이른 말일 겁니다. 거의 쓰이지 않거나, 옆집 정도의 아주 작고 협소한 의미로 축소되어 사용됩니다. 그런 이웃이라는 단어에 관해 환기하고 싶었습니다. 전작 살고 싶다는 농담은 우리 삶의 균형감각을 회복하고 긍정하기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최소한의 이웃』은 그 여정이라는 게 혼자 할 수 있는 종류의 수행이 아니라 함께 나누어 배려하고 염려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걸 알리는 기록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직접적인 만남보다 온라인 상에서의 활동이 더 많아졌어요. 온라인 상의 특징 중 하나가 '즉각적인 반응'이다보니 사람들이 너무 빨리, 쉽게 판단을 하게 되는 것 같고요
『최소한의 이웃』의 여러 글들에서, 판단을 멈춰보고, 회색지대에 서 보고, 좀 더 지켜보고 기다려보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보이던데요. 많은 사람들이 속시원한 '사이다'를 원하는 때에,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정체성 과잉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주변의 사건 사고들을 둘러봅시다. 자기가 명백하게 잘못해놓고 별안간 왼쪽과 오른쪽의 진영문제로 포장합니다. 자기가 잘못해놓고 영남과 호남의 지역갈등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자기가 잘못해놓고 세대갈등 때문이라 말하거나 계급과 권력의 문제로 바꾸어놓습니다. 사과 한 번으로 끝날 모든 잡다한 문제들, 시비를 가려 책임을 다하면 될 모든 화두가 정체성 대결로 환원되어 쏟아집니다. 바보 같은 짓을 저질러놓고 내가 보수, 혹은 진보라서 너희들이 내게 이런다는 말에 대해 우리는 헛소리라고 무시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말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정체성이라는 크고 거대한 말 뒤로 숨어 자기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 너무 쉽고 간편해졌습니다. 동의하지 않는 모두가 가해자고 나와 내 편만이 온전한 피해자라고 떠드는 사이 사건의 실체는 실종되고 말잔치만 남습니다.
책에서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중요하게 언급한 건 그 때문입니다. 내 편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나를 돕지 않았는데, 결코 내 편이라 생각할 수 없었던 천한 자가 나를 도왔을 때. 그 가운데 당신의 이웃은 누구냐는 질문입니다. 당연히 후자이겠지요. 우리 또한 정체성 논리에 과몰입하여 네 편 내 편으로 사람을 성급하게 판단하며 구분하지 않고, 맑고 직관적인 눈으로 삶을 대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판단을 멈추고 지켜보는 것, 다른 입장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극단적으로 가면 상대주의가 되어서 "너도 맞고 나도 맞고 모두 오케이!"가 될 수도 있거든요.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입장들을 포용할 수 있는, 작가님의 지향점이라면 어떤 것인가요 
 
모두가 옳다는 게 아니라 옳고 그름을 미리 결정해두고 그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추어 틀에 맞지 않은 사람을 배제하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이웃의 자격을 미리 정해두고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을 철저히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사람은 공동체의 적입니다. (앞선 질문의 답과 중복됩니다.)
 
LESS_김영사 제공
 
이번 산문집에 수록된 글들은 한 편당 분량이 짧은 편이에요. 짧은 분량의 글을 쓰는건 길게 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짧은 글을 쓰면서 어려웠던 점 또는 짧은 글을 쓸 때 특별히 신경 쓰는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긴 글을 버거워하는 독자가 늘었습니다. 하나의 작은 주제에 관해 제 기준에서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글의 길이는 3,000자에서 4,000자 사이입니다. 그러나 실상 지금의 독자가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의 길이는 그보다 훨씬 더 짧습니다. 퇴고 단계에서 제가 가장 신경 쓰는 건 문장의 길이를 다시 결정하고 같은 조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며 쉼표를 아예 빼거나 정확한 위치를 선정하는 일입니다. , 독자의 호흡을 조절하는 작업입니다. 그렇게 이 글을 읽는 동안 독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그런 기술적인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긴 글의 수요가 줄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이웃』은 애초부터 목적이 뚜렷한 책입니다. 길지 않은 글 안에서 사유의 기회를 나누고 책과 친숙하지 않은 독자를 자발적인 완독의 경험으로 이끄는 게 이번 책의 가장 큰 목표였습니다. 그와 같은 독자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요즘 말이 많은 문해력이란 결국 완독의 경험들이 쌓였을 때 발휘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살아가면서 뜻하지 않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주저앉거나 부정한 길을 선택하지 않고 끝내 회복하는 힘 또한 같은 길에서 나옵니다.
 
 
'내가 노력한 만큼 돌려받지 못한다, 인정받지 못한다, 이용당한다, 호구가 된다' 요즘은 이런 것들에서 실망하고 상처받고 분노를 갖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의 노력이 대부분 보답받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그럼에도 실망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평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평정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게 일어난 일을 자꾸 복기하면 자칫 피해의식이 생기기 쉽습니다. 내가 고통스러울 때는 스스로를 일방적인 피해자로 여기게 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피해의식은 반드시 나를 과몰입으로 이끌어 실수하게 만들고 진심이 아닌 상태에서 말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망하게 합니다. 나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빠르게 평정심을 회복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이미 지나가 되돌릴 수 없는 문제에 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책 전반에 걸쳐 그런 노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팬데믹 초기에는 그래도 인간에 대해 '그래, 인간은 나아질 수 있어'하는 약간의 낙관을 가졌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역시 인간은 안되겠어'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인데요. 뉴스를 보면 온통 어제보다 오늘이 안 좋아지는 것 같고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이 엉망진창일 때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고통에 압도되지 않고 희망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것을 기억하면 좋을까요?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습니다. 고통은 늘 실체가 또렷하고 압도적이지만 희망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탄과 증오로 가득 찬 술잔을 들이켜는 것으로 자유를 향한 갈증을 달래려 하지 말자"는 마틴 루서 킹의 말에서 자유를 희망으로 바꾸어 자주 떠올립니다. 혐오와 비관은 달콤한 도피처일지 몰라도 내게 어떤 대안도 제시해주지 못합니다.
 
 
책을 읽으면서는 '나의 이웃은 누구일까?'를 생각했는데, 책을 덮고 질문지를 쓰면서는 '그럼, 나는 어떤 이웃일까?'라고 묻게 되네요. '나는 어떤 이웃인가?'라는 질문을, 사실 거의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거든요. 이웃을 위해 엄청난 희생과 봉사를 하기는 힘들겠지만, 일상을 살아가면서 '이웃'으로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좋을까요
 
내가 일방적인 피해자라는 과몰입에서 벗어나 평정을 회복하고 온전한 나의 모습으로 상대와 대화하기. 내가 대접받기를 원하는 방식 그대로 상대에게 다가가기. 내가 표현하지 않거나 설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 상대가 미리 알고 있을 거라 예단하지 않기.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간단하게 부탁드려요.
 
이웃은 나란히 또는 가까이 있어서 경계가 서로 붙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 우리 모두는 이웃입니다. 여러분이 제 이웃이라 기쁩니다. 다음 책을 구상 중입니다. 한결같이 열심히 쓰고 말하겠습니다. 늘 건강하고 평안하세요.
 
 
| 박수진 (교보문고 북뉴스)
사진 제공_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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