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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금 위에 놓인 세계』한국표준과학연구원 연구원 7인과의 인터뷰

  • 2022.01.24
  • 조회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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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정하지 못한다면 과학은 발전할 수 없다. 시간을, 길이를, 무게를, 온도를, 전기와 빛을, 그리고 원자와 같은 물질량을 정확히 얘기할 수 없다면 오늘날의 첨단과학은 연구되기도, 설명되기도, 성립되기도 어렵다.
『눈금 위에 놓인 세계』는 측정단위의 역사와 발전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쓴 책으로 과학 연구의 성과를 대중과 나누기 위해 시작된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 연구자들의 글쓰기 모임 크리스 글벗의 첫 책이기도 하다. 책의 저자인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소속 측정과학자 일곱 명 - 강태원, 구자용, 박병천, 박창용, 이동훈, 이승미, 최재혁 박사 - 와 서면을 통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이동훈 강태원 구자용 이승미 최재혁 박창용

 
『눈금 위에 놓인 세계』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의 현직 연구원들이 공동 저자로 참여했다는 점이 눈길을 끄는데요. 표준과학이라는 분야가 생소한 만큼 연구원이 무엇을 연구하는지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연구원 소개 먼저 부탁드려요.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가 무섭게 곧바로 눈금 위에 놓입니다. 산부인과 간호사가 신생아의 키와 몸무게를 재니까요. 학생시절 키와 몸무게는 해마다 생활기록부에 기록되고, 성인이 되어 건강검진을 받을 때는 병원 컴퓨터에 기록됩니다. 그런데 키를 재는 자와 몸무게를 재는 체중계는 얼마나 정확할까요? 그것에 답할 수 있으려면 기준 자와 기준 저울이 필요합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정확한 기준 자와 기준 저울, 즉 표준 자와 표준 저울을 만들어 그것이 산업현장과 일상생활에 널리 사용되도록 체계를 갖추어 공급합니다. 다른 나라의 표준 자와 표준 저울과도 비교하여 국제적으로도 동등함을 보장합니다. 물론 자연과학과 공학 분야에 사용되는 거의 모든 단위에 맞게 눈금을 매기는 측정표준을 만들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새로운 측정표준이나 더욱 촘촘한 눈금이 매겨진 측정표준이 필요하겠지요. (예를 들면 코로나19 바이러스 검사에 사용되는 검사키트의 기준을 잡아주는 표준 물질이나 조선 강국인 우리나라 기업에서 커다란 배를 만들 때 사용되는 대형 크레인의 힘을 잴 때 쓰이는 큰 힘의 기준을 잡아주는 대용량 표준 저울 같은 것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시간, 길이, 질량, 전기, 온도, 광도, 물질량이라는 7개 국제단위계(SI)의 기본단위는 물론이고 이들 기본단위들이 서로 결합된 여러 가지 유도 단위에 대한 측정표준도 만들고 있습니다.
 
 
이번 『눈금 위에 놓인 세계』는 연구자들의 글쓰기 모임, ‘크리스 글벗’의 첫 책이라고 들었어요. 특히 연구를 위한 모임이 아닌, 과학의 대중화를 위한 글쓰기 모임이라는 점이 흥미로운데요. 바쁜 연구원들이 시간을 내서 모인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처음에 어떻게 모이게 되셨나요?
 
명함을 드렸을 때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이요? 거기는 뭐하는 곳이예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다보니 단위와 측정을 소개하는, 어렵지 않고 페이지 술술 넘어가는 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생들이나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강연할 때는 더더욱 필요성이 절실히 느껴졌습니다. 단위에 관한 대중서가 외국에서 출판된 경우를 종종 보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측정표준의 임무를 띤 우리 연구소에서 책을 쓰면 제격이겠다 싶었지요.
전문가들이 읽는 논문이나 보고서 쓰기에 익숙한 연구자가 일반 시민 독자를 대상으로 글을 쓰는 데는 훈련이 필요했어요. 연구원의 독서동호회 “크리스북”에서 뜻이 맞는 회원들이 글쓰기 학습조직을 만들어서 현직 작가님을 강사로 초빙하여 글쓰기 수업을 받았죠. 간단한 에세이를 써 보는 기초반에서 시작, 단계가 올라 갈수록 글쓰기에 조금씩 자신감을 얻었고, 급기야 우리도 단행본 책을 함께 써 보자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강사이신 작가님도 열성적으로 응원과 지원을 해 주셔서 그 결과물이 나오게 되었네요.
아무래도 “부캐” 활동이다 보니 시간을 내기 쉽지는 않아서 책을 써 보자고 결심하고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3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이 모여 함께 글쓰기를 배우고 토론을 거듭하며 책을 함께 써 나갔던 그 모든 과정이 우리에게는 재미있고 의미 깊었습니다.
 
 
책 제목이 특이한데요, 제목이 『눈금 위에 놓인 세계』로 정해지기까지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문득 드는 의문이 있는데요, 만약 세상이 눈금 위에 놓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글이 다 완성된 후 공저자들끼리 제목 짓기 공모를 했습니다. “눈금 위에 놓인 세계” 말고도 “단위, 너의 정체는?, “그것을 알려주마-기본단위 편”, “시길온질전광물”, “우울할 때 읽는 단위 이야기”, “하늘과 바람과 별과 단위” 등등 여러 후보가 있었지요. 최종적으로는 필로소픽 출판사의 편집회의에서 투표로 정해졌습니다.
세상에 단위가 없어진다 해도 이 우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죠, 원래부터 없었으니까요. 인간 세상이 문제겠죠. 과학적 인식체계가 무너지고 모호함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상상해 보세요. 어떤 이가 처음 가보는 높고 험한 산을 오르고 있어요. 너무 지치고 해는 뉘엿뉘엿해서 끝까지 오를까 내려갈까 고민하는 차에 등산로 안내표지를 발견했어요. 기쁜 마음에 다가가 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정상까지 조금만 더 가면 돼요. 힘내세요!” 정상까지 남은 거리정보가 필요한 이 등반가에게 무슨 생각이 들까요.
단위가 없으면 형용사와 부사와 비유만을 이용해 세상을 설명해야 합니다. 누군가에는 아름답겠지만 속 터지는 이도 있을 것 같습니다. 책 서문에 잘 설명이 되어있듯 단위가 없는 현대문명은 한순간도 유지될 수 없어요. 인터넷과 전화는 먹통이 되고, 비행기 기차 등 교통수단이 멈추게 됩니다. 모든 공산품의 부품이 고장 나면 볼트 하나까지 사용자가 직접 만들어 고쳐야 합니다. 상거래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고 세금도 걷을 수 없습니다. 곳곳에 다툼이 일고 세상은 엉망진창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한 움큼 더 얹어 주는 훈훈한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있습니다.
 
 
『눈금 위에 놓인 세계』는 어떤 독자들을 위해 쓰셨나요? 책을 어떤 방식으로 혹은 어떤 관점으로 읽으면 좋겠다는 저자로서의 제안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과학과 교양에 관심이 있는 모든 분들을 위해 썼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과학이 재미없는 학생들과 과학자가 되고 싶은 청소년들, 과학이 궁금한 모든 시민들이 우리의 잠재적 독자입니다(웃음). 이 책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처음부터 끝까지 순차적으로 읽으셔도 되고요, 서문에서 소개했듯이 목차에서 가장 관심있는 단위의 장을 펼쳐서 읽으신 후에, 목차를 다시 보시고 다음으로 관심 가는 단위를 찾아 읽으시는 방식도 좋겠습니다.
 
 
이 책은 일곱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일곱 분의 과학자가 각각 한 가지씩의 기본단위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기본단위’라는 단어가 생소하네요. 기본단위가 무엇인가요?
 
현재 세계에서 쓰이는 각국의 언어는 서로 달라도 아라비아 숫자와 단위는 똑같은 것을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국제적으로 똑같이 사용하자고 정한 단위의 모음이 국제단위계(SI)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 책에서 설명한 시간, 길이, 질량, 전기, 온도, 광도, 물질량을 재는 7개의 단위는 기본단위라고 부릅니다.
국제단위계 중의 다른 단위들은 유도단위라고 부르는데요, 이 일곱가지 기본단위들의 곱하기, 나누기, 거듭제곱으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속도의 단위인 m/s (미터 나누기 초), 부피의 단위인 m3 (미터의 세제곱), 밀도의 단위인 kg/m3 (킬로그램 나누기 세제곱 미터)가 유도단위입니다. 유도단위 중에는 와트 (W = kg m2 /s3 ) 나 볼트 (V = W/A = kg m2 /s3 /A) 처럼 특별한 이름이 붙은 것들도 있습니다.
원리적으로 모든 단위는 이제 7 개의 물리상수를 써서 직접 정의할 수 있지만, 기본단위와 유도단위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잘 정립되어 있을 뿐 아니라, 편리하므로, 그대로 쓰는 걸로 결정되었습니다. 기본단위가 무엇인지 요약하자면, 기본단위란 다른 모든 국제단위계의 단위를 유도해 낼 수 있는 단위로서, 시간, 길이, 질량, 전기, 온도, 광도, 물질량을 나타내는 7가지 단위가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보셔야... (웃음).
 
 
책 뒤표지에 보면 “단위 없는 일상도, 측정 없는 과학도 없다”고 되어 있는데요.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서문 표현처럼 측정과 표준은 ‘존재감 없이’ 존재하고 있고, 오직 ‘문제’가 생겼을 때만 존재감을 드러내는 게 단위일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사회에서 단위가 존재감을 드러낸 사건들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1999년에 있었던 화성 기후 궤도선 사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책에서도 다루었듯이 수천 억원을 들인 프로젝트에서 탐사선이 화성 궤도에 진입하던 도중 폭발한 사고인데요. 어이없게도 질량 단위인 킬로그램과 파운드를 혼동해서 생긴 인재였죠. 이보다 더 우리 일상에 가까운 사고도 있었습니다. 캐나다에서 일어난 일명 김리 글라이더 사건인데요, 1983년에 승객 61명을 태운 에어캐나다 항공기의 엔진이 고도 41,000 피트에서 연료가 바닥나 멈춘 겁니다. 다행히 기장이 항공기를 글라이더처럼 활공시켜 김리 공군기지에 불시착하면서 대형 인명피해를 막을 수 있었죠. 원인은 단위 착각이었습니다. 연료 무게를 킬로그램 대신 파운드 단위로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필요량의 4분의 1만큼만 급유한 겁니다. 아찔하죠. 우리가 측정표준과 단위에 관심을 기울이고 엄밀해지지 않는다면 이와 유사한 사고는 언제 다시 생길지 모릅니다.
 
  
이번에는 책의 특징에 대해 질문 드려볼게요. 『눈금 위에 놓인 세계』는 아무래도 여러 저자들이 쓰다 보니 다양한 형식의 글이 등장하는 것 같아요. 특히 ‘시계공의 꿈, 빅뱅에서 현재까지 오차는 1 초’는 한 편의 소설을 보는 것 같은데요. 이 꼭지를 쓰신 박창용 박사님께서 특별히 이러한 소설형식을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박창용 | 크리스글벗 모임에서 시간 단위와 시계의 발전사를 ‘환생하는 시계공’이라는 소설형식을 빌려 설명하자는 기획이 나왔습니다. 소설에 대한 아는 이론이라곤 고등학교 때 배운 전지적 작가 시점, 기승전결, 복선 깔기 정도인 제가 바로 오케이를 한 이유는 설명문보다 소설 안에 더 다양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역사적인 과장과 과학적 상상을 약간 섞는 재미도 있고, 상황 설정을 잘하면 이해하기 더 쉽게 복잡한 과학 이야기를 풀어 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실, 원리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아도 상황이 이해되면 이해된 듯한 느낌을 갖는 인간의 두뇌 구조에 살짝 편승한 것도 있어요. 잘 됐나 모르겠네요. 어쨌든, 글은 제 손을 떠났으니까요.
 
 
원자를 세는 단위 ‘몰’에 대해 집필하신 구자용 박사님께서는 영어 문학작품을 번역하고 그림까지 그리신다고 들었습니다. 허리 통증 치료 방법을 개발하기도 하셨고, 무엇보다 1990년대 초에 무려 원자현미경을 자체 개발하셨다고요!
 
구자용 |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우주 만물의 기본 구성물질인 원자물리학이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원자의 크기는 너무 작아서 개별 원자들의 위치는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그런데 1983년에 원자들의 배열을 직접 관찰했다는 연구논문이 나왔고 관련 분야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이 기술을 개발한 IBM의 과학자들은 1986년 바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물리학 전공이어서, 전공 분야가 달라서 모르고 있다가 1987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 들어온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수준은 낮아서 원자현미경을 자체 개발하는 것은 무리였는데 아무튼 저는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대책 없이 뛰어들었습니다. 전혀 다른 분야에 뛰어들어 중간에 성과 부진으로 기관장의 경고를 받기도 했지만, 오랜 고생 끝에 결국은 성공했고 이후에는 고진감래였습니다.
 
 
전기 없이 살 수 있을까요? 저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은데, 그 중요성과 달리 전기에 대한 이해는 어려운 것 같아요. 반면에 5장 ‘피카츄는 몇 만 볼트의 전기를 모을까?’를 쓰신 강태원 박사님께는 전기를 친근한 ‘피카츄’와 연결해 설명해주셨어요. 아마도 박사님께는 일상의 전자기기나 사용설명서, 요금 고지서 등이 달리 보일 것 같아요. 일상에서 전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강태원 |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1887년 경복궁에 전등이 처음 켜진 이후 135년이 지난 지금,) 전기 기기들이 넘치는 현대 사회에서 전기는 물, 공기, 햇빛 다음으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기는 눈에 안 보이지만 바람이 불면 공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전류가 흐르면 바늘이 움직이는 전류계가 있어서 전기가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는 전기스위치를 누르면 방에 전등이 켜지고 텔레비전이 나오고 휴대전화 화면이 켜지는 것을 보면 전류가 흘러서 전기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전기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다면 휴대전화 충전기 플러그 부분에 쓰인 조그만 글씨를 한번 읽어 보세요. 아마 값은 다르지만 ‘정격출력 DC 5.0 V, 2.0 A'라고 적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전압의 단위 V는 볼트라고 읽고 전류의 단위 A는 암페어라고 읽습니다. 이 책에서는 전압과 전류를 포함하는 전기 분야 기본단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그것의 크기를 실제로 재기 위한 측정표준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발전되어 왔는지를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볼타 전지. 1899년 이탈리아 코모 시에서 열린 볼타 100주년 기념전시회에 전시되었다. 그해 7 8일에 발생한 화재에서 가까스로 건져냈다고 전해진다. (저작권: Attribution 4.0 International(CC BY 4.0). 원본파일에 변형을 가하지 않음)
 
‘들어가도 되는지는 온도계에 물어보세요’ 꼭지를 쓰신 이승미 박사님께서는 지난 해에 ‘어, 이렇게 솔직해도 괜찮은 거야?’ 싶을 만큼 솔직하고 발랄한 독서 에세이 『이제라도 깨달아서 다행이야』를 내셨어요. 과학자로 일하면서, 읽고 쓰고, 아이들도 돌보는 삶. 식지 않는 박사님의 열정 온도는 몇 도일까요? 시간 관리 비법이 있을까요?
 
이승미 | 『이제라도 깨달아서 다행이야』의 기획 단계에서는 필명으로 내려고 했었어요. 그래서 과학이야기가 거의 없고 독자가 걱정하는 수위의 표현도 좀 나옵니다. 그 책은 내 안의 수많은 자아들 중에서 문학작품 독자로서의 자아가 쓴 거구요, 『눈금 위에 놓인 세계』는 과학자 자아가 썼지요. 동료들과 함께 책을 내는 게 제 버킷리스트에 있어왔어요. 굳이 시간관리 비법이라면 머릿속에 모래 한 알 한 알이 떨어지는 모래시계 이미지를 가지고 사는 것이랄까요? 매 순간 내 남은 인생이 줄어들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으면 그 소중한 시간을 투자해도 좋을 법한 일을 선택할 때 큰 도움이 돼요.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새로운 관심거리도, 읽고 싶은 책도 늘어만 가는데, 뒷감당할 시간은 늘 모자라요. 저는 잠을 줄여서라도 하루에 두 시간씩은 책 읽기, 일기 쓰기, 읽은 책 요약하기 등등 읽기와 쓰기에 투자하려고 노력합니다.
 
 
최재혁 박사님께서 질량 단위에 관해 쓰신 ‘도대체 내 몸무게가 어떻게 된다는 거죠?’는 농담도 자주 하시고 사진도 많아서 술술 읽혔습니다. 특히 캐리비안의 해적에게 미터법의 기준이 되는 임시 표준기를 도둑맞았다는 드라마 같은 사실도 흥미로웠고, 더욱이 그것을 화성탐사선 폭발과 연결시킨 대목에선 ‘푸핫’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어요. 원래 유머가 많고 유쾌한 성격이신지요?
 
최재혁 | 우리가 영화배우나 가수가 아니지만 영화와 음악 이야기로 몇 시간이고 즐겁게 얘기하듯이,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과학 이야기로 즐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도 그런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유머를 이야기하니, 한 장면이 생각나네요. 학생과 연구원들이 빼곡히 모인 지도교수님 사무실에서 제가 세미나를 했었는데 그날 교수님과 제가 크게 부딪쳤어요. 외국 경쟁그룹의 논문 내용에 대해 교수님께서 잘못 기억하고 계셔서 제가 정정해드렸는데도 받아들이시지 않는 거예요. 교수님과 저의 목소리는 계속 커져 가고, 후배들과 연구원들은 겁먹은 얼굴로 숨소리도 못 내고 있었고요, 교수님께 말씀드렸어요. “잠시 기다리시죠. 제 책상에 가서 논문을 가져와서 보여드릴게요.” 그리고 사무실을 나와 논문을 찾아 문제의 부분을 펼쳤는데, 아뿔싸! 어찌 이런 일이, 제가 틀렸던 거예요. 교수님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이 어찌나 멀던지. 순순히 틀렸다는 걸 인정해도 수습이 되지 않을 분위기였거든요. 결국 문을 열었죠. 그리고, 씽긋 웃으며 엄지를 올리고 “유 윈!” 하고 외쳤어요. 그러자 적막이 가득하던 방에 웃음이 터지면서 교수님께서도 결국 웃으셨어요. 그리고 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세미나를 이어 갔죠.
 
 
박병천 박사님께서는 일곱 개의 기본단위 중 가장 역사가 긴 ‘미터’ 이야기를 써주셨는데요. 긴 역사와 사연만큼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어떤 이야기를 담아야 할지 많이 고민하셨을 것 같아요. 글을 쓰실 때 어떤 점이 가장 어려우셨을까요?
 
박병천 | , ‘도량형’은 인류가 삶 속에서 피부로 직접 느끼는 것이고,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사연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 중에는 이미 잘 알려진 얘기들이 많은데다, 지면의 한계도 있어서, 여기서는 프랑스혁명부터 현대까지 동안에 일어난 미터 정의의 변천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동서양의 고대 및 중세 부분, 미터가 전통단위들과 만나면서 벌어지는 얘기, 그리고 오늘날의 첨단 길이측정 얘기 등은 빠지게 되었어요. 내용을 빼고 축약하는 것이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장 어려웠던 것은 글재주가 부족한 제가 처음으로 교양서적을 쓰는 것이었어요.
 

프랑스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기록원 미터와 기록원 킬로그램. (출처:Terry Quinn, The
Metre Convention of 1875: A Commentary and new English edition.La Rivista del Nuovo Cimento 42.6, 2019)
 
측정과 표준과 단위, 어쩐지 딱딱하고 어렵기만 할 거 같았지만 이동훈 박사님의 글 ‘스타워즈의 광선검은 과연 가능할까?’에 “너무나도 인간적인 단위”라는 표현이 나오잖아요. 자외선 지수, 눈에 편안한 조명 등에 관련된 빛의 세기 단위를 말씀하면서 그 표현을 쓰셨는데, 측정과 단위라는 것이 모두 그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사님의 과학철학, 측정철학을 들려주신다면 좋겠어요.
 
이동훈 | 철학이라고 하기는 많이 부족하지만, 저는 과학기술 분야 학문도 결국은 사람의 삶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구 대상이 사람은 아니더라도 연구의 주체도 사람이고 그 혜택을 받는 것도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항상 사람의 삶과 연관을 지어서 과학기술의 원리나 용도를 설명할 수 있도록 고민합니다. 다행히 제가 연구하는 광도 단위는 자체적으로 사람의 특성이 반영된 매우 특수한 경우라서 “인간적인 단위”라는 표현을 썼던 것이죠.
 
 
서문에서 ‘존재감 없이 존재하는 측정과 표준’이라 표현하셨는데요, 측정과 표준을 연구하는 과학자의 일을 빗대어 표현하신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구자들은 온종일 실험실에서 측정만 하시려나요? 저자들의 업무 일상은 어떨지, 주말이나 여가시간은 어떻게 보내는지가 궁금합니다.
 
최재혁 | 과학도 재미있지만 세상에는 흥미로운 게 많잖아요? 가끔은 제가 꼭 아이스크림 전문점에 들어선 아이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허락된 시간 동안 눈앞의 모든 걸 맛보고 싶은 마음인 거죠, 플루트를 연습하는데 기차 디오라마도 꾸며야 하고, 테니스를 배우는데 관상새우도 돌봐야 하고, 듣고 싶은 음악과 읽고 싶은 책의 리스트는 늘어만 가고. 하지만 이상향은 미니멀리즘이하는 게 함정. 엉망진창이죠, 하하.
 
이승미 | 저는 주말이나 휴가에는 전공과 다른 주제의 책을 읽거나 써요. 『인공지능이 사회를 만나면』, 『인류세와 에코바디』에 공저자로 참여하면서 알고 있는 것과 글로 쓰는 것 사이의 머나먼 간극을 깨달았지요. 안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고 그냥 대충 분위기 파악만 하는 거였더라고요. 올해에는 동료들과 함께 『눈금 위에 놓인 세계』를 내게 되어 저는 너무 기쁩니다.
 
이동훈 | 연구자가 실험실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는 모습은 작가가 온종일 책만 읽는 모습처럼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림인 듯합니다. 실험실에서 일을 하려면 더 많은 시간을 논문, , 보고서 등을 읽고 여러 종류의 글을 쓰는 데 할애해야 하더라고요. 저같은 경우 “워라밸” 업무 일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밤늦게까지 실험실을 지키고 새벽까지 데이터를 수집하는 그런 일은 거의 없도록 컴퓨터를 사용하여 측정과정을 미리 자동화해 두죠. 주말은 가족과 함께 지내는 편이고 취미활동으로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등 현악기를 연주합니다. 현재는 “사이엔티아”라는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구자용 | 과학은 자연의 원리를 밝히는 것이라 측정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처럼 사람의 머리로만 생각하면 잘못된 길로 가기 쉽습니다. 요즘 흔한 말로 팩트가 중요하다고 하지요. 실제의 측정을 해야 정확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과학의 올바른 길을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몰랐던 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새로 알게 되고 세상을 바꾸게 되면 아주 재미있고 보람도 있지요. 그런 재미있는 일을 하고 돈까지 받으며 생업으로 하는 것도 좋습니다. 취미로는 어려서부터 시작하여 20년 이상 계속했던 바둑, 10년 이상 투자한 영미소설을 원어로 읽기, 10년 동안 열심히 했던 골프, 25년 동안 성의 없이 해온 주식투자 등이 있네요. 앞으로는 국내에 번역이 되지 않은 영미소설들을 번역하려고 하고 있으며, 은퇴 후에는 20년 정도 주식투자와 이를 위한 경제공부에 집중할까 고려하고 있습니다.
 
 
임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눈금 위에 놓인 세계』는 새해 첫 주에 출판되었는데요, 저자들의 개인 소망과 바람은 무엇일까요? KRISS글벗의 계획도 궁금합니다.
 
강태원 | 혼자 글을 쓸 땐 마음이 편했는데, KRISS글벗의 책쓰기 프로젝트에 참여할 때는 출판될 책이 사람들에게 읽힌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꽤나 무거웠어요. 가능한 한 오류 없이 써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것이 밀려왔습니다. 새해에도 건강하고 즐겁게 살면서 가진 것에 감사하며 삶의 흔적을 글로 남기는 일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박창용 | 언젠가 좀 더 전문적인 글로 제가 하는 연구를 소개하는 책을 내고 싶기도 하고 만화책처럼 더 쉬운 내용으로 초등학교 어린이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도 만들어 보고 싶어요.
 
최재혁 | 무엇보다 코로나 대유행이 얼른 종식되고 사람들이 건강한 일상과 그 속의 소소한 즐거움들을 되찾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가 즐겨듣는 김겨울 님의 라디오 북클럽에 저희 책이 소개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네요.
 
박병천 | 책 출판은 새해 첫 선물이었어요. 신기하기도 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또 이런 일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인 바램은 앞으로 글과 소프트웨어를 통해 지금까지의 일과 생각들을 정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연히 글쓰기 수업에 들어갔다가 KRISS글벗 멤버가 된 것은 기막힌 행운이었어요.
 
이승미 | 이 책이 널리널리 알려지고 독자들께 사랑받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크리스글벗이 다음 책도 얼른 시작할 기운이 나지 않겠습니까? (웃음)
 
이동훈 | 이 책의 출판 일자가 저의 50회 생일과 겹쳐서 의미가 남달랐습니다. 개인적인 소망이라면 저의 중고등학생 아이들이 이 책을 읽고 다음 책에 대한 계획을 물어봐 주는 것입니다. 제 아이들이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과학이 어려운 청소년들, 그리고 과학자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과학을 하기 위해 필요한 건 호기심과 천천히 오래 생각하는 습관. 천재가 아니라고 포기하지 말자. 과학자 대부분은 천재가 아니다.
과학을 어렵게 여기는 이유는 원리와 인과관계를 스스로 생각하게 하지 않고 그저 암기하게 만드는 성적 만능주의 시스템 때문일 것입니다. 누구나 어릴 때는 과학자였습니다. 기어다니기 시작한 아기 시절부터 우리는 뭐든 눈에 보이는 것은 입 안에 넣어보는 위험한 실험을 했으며, 좀 더 자라서 말문이 트이면 뭐든지 새로운 것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쏟아놓곤 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찾아낼 여유 없이 그저 잘 외워서 성적이 높다는 게 과학자가 될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청소년들에게 일단은 『눈금 위에 놓인 세계』를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웃음).  
그리고 교과서로만 배우는 학교 공부로는 좀 딱딱하고 재미가 덜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니, 과학전시관과 박물관도 방문해보고, 인터넷을 활용하여 과학강의나 동영상 콘텐츠를 보는 것도 좋겠어요. 영어로 된 콘텐츠가 훨씬 더 많다 보니 영어공부도 하게 되는 일석이조 효과도 있겠네요.
 
 
| 기사 및 사진 제공_필로소픽
 
 
 
눈금 <!HS>위에<!HE> 놓인 세계 [과학]  눈금 위에 놓인 세계
강태원 외 | 필로소픽
202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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