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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던지는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박연숙 “죽음은 스스로 창조한 삶의 ‘완성’”

  • 2021.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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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삶의 마지막일 뿐일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두려운 것일까? 숭실대학교 교양대학 박연숙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수많은 죽음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다 생의 의미가 더 또렷해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문학과 영화 등 수많은 예술작품과 철학자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발견한, 삶의 빛나는 순간을 포착하도록 이끄는 죽음의 이면에 대한 깨달음을 담은 『죽음이 던지는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박연숙 저자와의 인터뷰를 전한다.
 

 
책에서 ‘아무도 들려주지 않은 죽음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창조하는 삶의 이야기가 되길 바란다’라고 하신 말씀이 인상적인데, 스스로 창조한다는 의미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우선 한 가지 설명을 하고 나서 질문에 답해 볼게요. 죽음이 주제인 책에서 삶을 강조하는 것이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몇 년 전, 집에 도둑이 들어 부모님께서 남겨주신 소중한 유품을 모두 도난당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도난당하기 전에는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금거북이고 다이아몬드 반지였지만, 신기하게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서 사라졌음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것은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는 뜻깊은 존재임을 깨달았고 의미가 가슴에 깊이 와닿았어요.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것의 존재와 의미가 선명하게 다가왔지요.
 
우리도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존재의 소중함을 깨달을 때가 있잖아요? 헤어진 뒤에 그 사람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물론 잃어버리기 전에 그것의 진가를 아는 지혜로운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잃고 나서야 뒤늦게 알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삶도 마찬가지예요.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그냥 살 뿐이지요. 그러나 죽음이 있음으로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삶을 인식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의 고유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 책에서 다루는 열 네 편의 문학 작품과 영화 속에 똑같은 죽음은 하나도 없어요. 모두가 고유하고 특별해요. 때문에 죽음에 대해 누구도 정답을 말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던지는 질문에 답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지요. 이 질문에는 누가 대신 대답해 줄 수도 없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해요. 다른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아닌 나다운 삶을 살다가 죽음으로써 고유한 나의 삶을 완성하는 것이 스스로 창조하는 삶이에요. 이때의 죽음은 스스로 창조한 삶의 ‘완성’을 의미하지요.
 
 
없을 때야 비로소 가치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죽음을 통해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말씀은 잘 이해됩니다만, 자신의 삶이 너무 초라하고 보잘것없다며 죽음이 삶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이 책이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자신의 삶이 견딜 수 없이 비참하고 더 나아질 것이 없다고 생각될 때 극단적 선택을 고민할 수 있어요. 그러나 좀 더 거시적으로 바라보고 지금 맛보는 인생의 쓴맛이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삶을 더 풍부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극복하려는 용기를 가져야 하지요.
 
그러나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죽음이 던지는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2,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어도 살아야 할까?>를 추천합니다. 질문에 답해 나가면서 강제수용소처럼 극도의 절망적 상황에서도 운명의 의미를 찾는 인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절망과 분노에 차 비굴하게 끌려가듯 운명에 굴복할 수도 있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를 가지고 품위 있게 자신의 운명을 맞이할 수도 있어요. 만약 후자처럼 살고 싶다면 자신이 처한 상황이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느냐에 귀 기울여야 해요. 보통은 자신이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묻지만, 반대로 삶이 내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묻는다면 새로운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과도 같아요. 그 질문에 답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삶을 발견하고, 그 삶에 책임지겠다고 마음먹으면 스스로도 놀랄 만한 용기가 생깁니다. 용기를 가지면 어떤 상황에서도 후회 없이 살아갈 수 있어요.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 싶지만,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못 한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든 것이 갖춰진 뒤에야 챙길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해 주실 조언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내면의 소리는 모든 것이 갖춰져야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부족하고 불만족스러운 것이 있을 때, 자신을 옭아매는 제약으로 답답할 때 더 잘 들린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안락과 여유가 아니라 곤란과 위기 속에서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어요.
 
사실 ‘모든 것이 갖춰진 상황’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더 잘 살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해야 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에 싸여 있지요. 그것이 바로 인간의 운명 아닐까요? 끝없이 몰려드는 문제를 해결하며 성장하는 우리는 성장의 방향을 잘 잡기 위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해요. 그렇지 못하고 정신없이 남을 따라만 한다면 겉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자기의 고유한 삶이 아닌 빈 껍데기 같은 삶, 자기 삶에 자기 자신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죽음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깨닫습니다. 이 책에서도 소개하지만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주인공이 바로 그런 사실을 깨닫고 무척 괴로워하지요.
소확행이라는 말이 나와서 반가웠는데, 너무 많은 욕심을 바라는 것이 문제임을 알고 소확행을 꿈꾼다면 모를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꿈꾸는 것을 거부하기 위한 일환으로 소확행을 선택하는 것은 문제라는 말이 와닿았습니다. 이 책을 통해 죽음을 안다는 것이 꿈을 잃은 이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꿈을 ‘잃었다’는 표현을 살펴보면 그전에는 꿈이 있었다는 의미이지요? 어린아이들은 꿈이 참 많아요. 어떤 아이들은 도저히 이룰 수 없어 보이는 꿈도 자유롭게 꿉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기쁜 일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어요. 언제나 마음껏 꿈꾸던 어린아이들은 어쩌다 꿈을 잃고 꿈꾸기를 포기한 채 ‘소확행’에 만족하는 사람이 됐을까요? 제 생각에는 예전보다 자녀 수가 적어지면서 부모님의 관심과 기대가 자녀 한두 명에게 집중됐고,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부담감이 꿈을 압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어른이 됐어도 남들이 좋다는 안전한 길 외에 다른 길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해요. 그러면서도 남들의 기대에 못 미칠까 봐 몹시 두려워하고 늘 불안해합니다. 그 불안한 마음을 달래는 것이 ‘소확행’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죽음 인식입니다. 죽음은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사람인지를 비춰줍니다. 그 거울 앞에 서면 빈 껍데기인 자신을 발견할 수도, 당당히 빛나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내일 당장 죽음이 찾아올 수 있음을 의식한다면 인간은 자신이 지켜야 할 꿈과 그 꿈을 위해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어요. 거울이 나를 비춰주듯이 죽음이 삶을 되돌아보게 해준다는 의미이지요.
 
 
‘왜 사는지 모르겠는 나를 위한 철학 수업’이라는 부제가 눈에 들어옵니다. 죽을 때까지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린 나이에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고 사는 청소년들도 있지요. 의미를 찾는 것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평소 어떻게 살아가면 찾을 수 있는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의미를 찾지 못한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것은 객관적 수치만으로 평가되는 삶을 사는 거예요. 연봉으로 얼마를 받는지, 얼마짜리 집을 가졌는지, 어떤 차를 가졌는지로 파악되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평가받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서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반면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산다는 것은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지니며 산다는 의미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장미 정원에 있던 수많은 장미와 어린 왕자가 돌보던 장미가 같은 것이 아니듯 의미를 가지면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되지요.
 
의미는 그냥 주어지지 않아요.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해주었듯이 시간을 들이고 책임을 져야 해요. 자기 삶의 의미는 자신이 어떤 대상을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정성을 들이고 책임을 다하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그저 경쟁을 위해 노력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만 그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경쟁에서는 이기고 지는 것만이 있지만 무언가를 진실로 사랑하고 그것에 책임을 다하면 그 대상도 나 자신도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저는 학교에서 적은 연봉을 받고 한 주에 15시간을 강의하는 교육 전담 교수입니다. 만약 제가 제 일에 의미를 갖지 못한다면 저는 제가 받는 적은 연봉만큼 자존감이 낮은 사람으로 살았을 거예요. 그러나 저는 제가 하는 일이 학생들의 인생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고,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며 정성을 들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배우고 깨달은 것들을 학생들과 나누고자 노력해요. 그리고 귀 기울이지요. 학생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그들의 아픔과 희망을 발견하고 일깨워줘요. 진심을 다해 한 학기를 보내고 나면 학생들의 성장한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이 일을 한 학기도 쉬지 않고 20여 년을 하고 있는데 한 번도 지치거나 귀찮았던 적이 없어요. 매 학기가 기대되고 매 학기에 감사하고 저의 자존감도 더 강해집니다. 삶의 의미는 이처럼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책임지는 데서 얻어지지만 결과적으로는 나 자신을 충만하게 해줍니다.
 
 
열네 편의 문학 작품과 영화를 통해 죽음을 이야기하시는데 혹시 미처 소개하지 못한 작품은 있을까요? 그 작품에서는 어떤 죽음을 다루고, 그 죽음을 통해 어떤 점을 배울 수 있을까요?
 
애초에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작품 중에 애니메이션 <코코>가 있어요. ‘코코’는 주인공 미겔의 증조할머니입니다. 그녀는 치매를 앓고 있지만, 희미하게나마 어린 시절 집을 나간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지요. 만약 그녀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는다면, 죽은 자들의 세계, 사후 세계에 사는 아버지는 그곳에서조차 사라집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기억’이 연결해 준다는 아이디어가 흥미로운 영화이지요.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자식을 낳아 기르고, 작품을 남기고, 필요 이상의 많은 재산을 쌓아 성공한 사람으로 기억되려 하지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이어지기를 기대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하는 방법이에요.
 
<코코>가 보여주는 사후 세계는 멕시코 전통문화를 모티브로 삼았지만, 우리도 각자 나름대로 사후 세계를 상상합니다. 아직 명확히 밝혀진 것은 거의 없지만, 몇몇 증거는 죽음 이후 무언가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게 하지요. 이승을 떠난 가족이 이승의 가족을 보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두 가족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단지 상상이라고 하기에는 확실한 메시지를 줄 때도 있어서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가능성을 열어 두고 싶었어요. <코코>를 통해 저처럼 여러분도 사후 세계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 기사 및 사진 제공_갈매나무
 
 
죽음이 <!HS>던지는<!HE>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인문]  죽음이 던지는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박연숙 | 갈매나무
2021.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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