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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살게 하는 기억, 이야기, 그리고 사랑『밝은 밤』최은영

  • 2021.08.09
  • 조회 3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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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에서 기차를 타고 세 시간을 가야하는 곳이 황해도 삼천이다. 삼천에서 백정의 딸로 태어난 아이는, 어쩌다 양민의 자식을 만나 결혼을 한다. 태어난 곳을 따서 '삼천이'라고 불렸던 그는, 처음으로 친구 '새비 아주머니'와 우정을 나누게 된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애틋한 마음이 오가는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지연'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강원도 바닷가의 작은 도시 희령으로 떠난다. 지연은 그곳에서 외할머니인 '영옥'을 만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엄마인 '미선'과 관계가 소원해진 할머니와는 근 이십여 년 만의 재회였다. 그리고 지연은 할머니를 통해 증조모인 삼천이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낯선 곳에 혼자 도착했던 지연은, 할머니가 들려준 증조모의 이야기를 통해 백년의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살아갔던 사람들과 연결되고, 함께 살아가게 된다. 『밝은 밤』 은 이야기, 기억, 그리고 사랑이 과거를 살려내고 현재와 이어지게 하고 우리를 외롭지 않게 한다는 걸 알려주는 소설이었다.
첫 장편소설 『밝은 밤』을 출간한 최은영 작가와 작품에 대해 나눈 이야기들

 

 
첫 장편소설 『밝은 밤』을 출간했습니다. 『밝은 밤』이라는 제목은 어떤 의미인가요? 
 
어떤 사람들의 인생에 대해서 팔자가 세다, 운이 없다, 그런 말을 쉽게 하는데요. 소설 속 인물들이 살아가는 인생은, 밖에서 보면 너무 어둡고 고생스럽고 힘들어 보여요. 하지만 실제 그 삶으로 들어가보면 그 안에는 친구도 있고 나름의 삶이 있고 소중한 기억들이 있죠. 그리고 그런 기억들로 인해 살아가는 것 같고요. 저희 할머니도 굉장히 힘들게 사셨지만 사람들과의 작은 기억 같은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밖에서는 어두운 밤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밝은 순간들이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장편 소설을 쓰는 경험은 단편 소설을 쓸 때와는 많이 다른가요?
 
완전히 다른 장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 쓰기와 단편 소설 쓰기만큼의 차이라고 할까요.  단편 소설은 많이 써봤지만 장편 소설을 쓰려고 하니까 처음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이 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스러웠어요. 막막했고요.  
그래도 이번에 한 번 경험을 해봤으니까, 앞으로도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처음에는 경험도, 감도 없었는데, 이제는 장편소설을 쓰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건 알았으니까요(웃음).
 
 
4대에 걸친 여성들의 이야기를 첫 장편으로 다루고 싶다고 생각은 언제부터 하게 된 건가요?
 
예전부터 제가 태어나지 않았던 시간을 살았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어요. 그러다 중편 소설을 준비하려고 쿠바에 있을 때 '삼천이'라는 인물을 처음 생각했는데요. 그때 삼천이라는 인물을 처음 만나긴 했는데, 이 인물이 가진 이야기가 너무 긴 것 같아서 중편 소설에는 쓸 수 없어 잠시 넣어두었죠
그러다 장편 소설을 시작하면서 삼천이가 생각나서 예전 파일들을 찾아보니까 인물에 대한 스케치가 남아있더라고요. 삼천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만 쓰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이어진 이야기가 되었어요
 
 
3대에 걸친 이야기만 해도 긴 시간인데 더 거슬러 올라가 증조모의 이야기까지 담아낸 것이 흥미로웠는데요
 
예전에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읽었는데, 거기에 어떤 백정 소녀가 나와요. 사람들이 그 소녀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서 짧게, 한 페이지 정도만 나오는데도 너무 가슴에 남더라고요. 보통 백정에 대해서, 과거에 그런 신분이 있었다,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 그 사람들이야 말로 존재만으로 존재를 부정당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언젠가 나중에 백정이고, 여자고, 어린 사람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그러다 보니까 배경이 절로 이렇게 거슬러 갔던 것 같아요


지연이 어린 시절 이후 오랜만에 할머니 영옥을 다시 만나게 되면서 소설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데요. 할머니인 영옥은 일반적으로 많이 보여지는 할머니와는 좀 다른 모습을 보이더라고요.  
 
모든 것을 다 주는 자애롭고 헌신적인 할머니, 모든 감정을 다 내려놓은 차분하고 현명한 할머니, 그런 모습들을 많이 생각하시는데요. 저는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저 자기의 감정이나 생각을 감추는데 능해지는 것뿐이죠
영옥도 손녀인 지연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결정적인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해요. 거리도 두려고 하고요. 자기만의 세계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도 혈연 가족과는 거의 교류가 없지만 이웃 할머니들과 유사 가족 같은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자기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아나가는 사람이고요. 또 한편으로는 관계가 틀어진 딸에게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약간 회피적인 사람이기도 하죠
 

 
작품 속에서는 긴 시간 동안 여러 세대에 걸친 여성들 사이의 다양한 관계들이 보여지는데요.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엇갈리는 엄마와 딸, 서로를 지지하고 지탱해주는 우정의 관계, 좀 더 편안하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할머니와 손녀, 이런 관계들이요. 특히 증조모(삼천이)와 새비 아주머니의 관계는 뭐랄까요. 혈연관계도 아니고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이도 아니고 대가를 주고받은 것도 아닌데 아름답게 지속되는 관계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제가 항상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가, 여자들이 서로 좋아하고 갈등하고 친밀하기도 한 뭔가 복잡한 관계의 이야기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고 항상 쓰고 싶어해서 자연스럽게 그런 것들이 중심이 된 것 같아요
 
백정의 딸이었던 삼천이는 늘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다가 처음 새비 아주머니라는 친구를 사귀게 된 거거든요. 그런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조심조심 말하고 행동했을 거예요. 애지중지 대했다고 할까요. 오랜 시간 멀리 떨어져 살아도, 그 사람이 있기에 내 인생에 뭔가 의미가 생기는 그런 관계인 거죠.   
삼천이와 새비 아주머니의 관계는, 분명히 있을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해요. 세상에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나를 사랑해주는 이런 사람이 있어' 그런 생각이 살아가는데 굉장히 큰 힘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의 인생은, 신산하고 힘들고 상처가 많아요. 그래서 체념 섞인 말도 하고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은 패배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고요
 
사람을 비참하게 그리고 싶지 않아요. 아무리 소설 속 인물이라고 해도 끝까지 다 꺾어버리고 싶지 않아요. 저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는 것 같고요. 그리고 나에게도 이런 얘기를 해주고 싶거든요. 계속 실패하면서 살기는 해도, 그래도 네가 계속 살려고 하고, 또 살아있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라는 이야기를요. 계속 이기고 성취하고 모든 것을 잘 해내면서 살지 않아도 괜찮아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대견한 것이라는 생각을, 나이가 들수록 더 하고 있어요.  
 
 
소설을 다 읽고 든 생각이, '그래, 힘들고 아파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지' 이런 거였어요. 사랑을 하면 미움도 있고 갈등도 있고 힘든 일도 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요
 
마음이 차가워지고 미움조차 없을 만큼 메말라가고, 그런 식의 마음가짐이 장려되는 사회인 것 같기도 해요. 감정이 많으면 살기 힘들고, 특히 사랑이 많은 사람은 바보같다는 말을 듣고 조롱받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사랑이 결여된 마음가짐으로 한 명 한 명이 살아가는 사회라면, 얼마나 무서운 공간이 될까, 너무나 쉽게 폭력으로 빠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사람이 사람을 생각해주고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유일한 것이라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고요
 
 
상처 많은 삶에서도 결국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여자들의 이야기 반대편에는 증조모와 할머니와 엄마와 지연의 삶에 상처를 안겼던 남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승자인가, 하면 전혀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아요. 그들은 오히려 진정한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려 했고 사랑과 거리를 두고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생각이죠.  
 
그 사람들의 삶도 당연히 복잡하고 여러가지 에피소드들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은 이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바쁘고(웃음), 그들에게는 굳이 서사를 많이 주고 싶지 않았어요. 소설에서 캐릭터를 만들 때, 평면적인 인물로 그리면 안 된다고 하지만 실제로 인생을 살다 보면, 놀랍게도 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평면적이기도 하더라고요
 
남자와의 관계가 실패했을 때 '여자 인생 망했다'는 식의 가부장적 가치관이 있어요. 어떤 남성과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그 여자 인생의 등급이 매겨진다는 생각도요. 그런데 저는 그런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남자와의 관계도 인생의 일부일 뿐이에요. 한 사람의 인생에는 꿈도 있고 일도 있고 친구도 있는데, 그걸 다 지우고 남자들과의 관계로만 여자의 인생을 평가하는 것이 싫더라고요
 

 
지연은 알지 못했던 증조모와 새비 아주머니의 얘기를 들으면서 전혀 생각지도 않던 삶과 연결되고, 그 연결이 지연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기억하는 것, 이야기하는 것이 백 년이 넘는 시간과 이 인물들을 연결해주는 시작이었다 생각해요
 
기억이라는 것이 없으면 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 나의 정체성을 만들고, 다른 사람과는 다른 ''라는 자아 관념을 갖게 하니까요. 기억하지 않으면 자기를 잊게 돼요. 기억되지 않는 순간 존재가 사라져 버리고요. 계속해서 글을 쓰는 이유도, 내 안에서 잊고 싶지 않을 것들을 계속 살리고 싶고, 계속 숨을 불어넣어주고 싶어서에요. 결국 내가 나로 살고 싶어서죠
 
너무 힘들어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있을 거에요. 그런데 자신이 겪은 일을 계속 외면하고 억압하려고 하려고 하면 그건 언제든 다른 방식으로 변주되어 현실에 나타나요. 그래서 기억하고 인정해주는 것이 중요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기를 잃어버리고 과거를 반복하게 되니까요. 제가 그런 경험을 했고요(웃음). 
 
 
소설의 마지막 장면, 오래된 사진을 함께 보면서 미소짓는 장면도 정말 좋은 마무리였어요
 
너무 오랜 시간 쓰다 보니까 이 작품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몰랐어요. 그래서 '어떻게 마무리하지?' 생각하면서 계속 쓰고 있었는데, 이 장면을 쓰는 순간, 끝났어요. 저도 '? 이게 끝인가?' 싶어서 약간 충격이었는데(웃음), 끝이란 걸 알겠더라고요. 황당한 이별이었어요(웃음). 이야기가 알아서 열리고, 알아서 닫힌 것 같아서 신기했어요(웃음).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부탁드려요
 
그냥재미있게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항상 바라는 거죠. 왜냐하면, 사는 것도 빠듯하고 시간도 없고 쓸 수 있는 에너지도 딱 정해져 있고, 책도 많잖아요. 그 가운데 한 권을 골라서 읽어주시는 건데, 그게 재미없으면 어떡해요.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읽어주시는 만큼,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해요
그리고 항상 고맙고요. 제가 생각만큼 작품 활동을 많이 하지 못해서 기다리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요. 앞으로 더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웃음). 


| 박수진 (교보문고 북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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