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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에게』김금희 “계속해서 열리는 길을, 조금 더 믿어봐요”

  • 2020.10.21
  • 조회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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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열세 살 초등학생 이영초롱은 제주 본섬에서 한번 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고고리섬'의 고모에게 맡겨진다. 집이 완전히 망해버렸기 때문에. 영초롱이 고고리섬에서 만난 친구가 복자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판사가 된 영초롱은 좌천 성격으로 제주도로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오래전 어색하게 헤어졌던 복자와 다시 만나게 된다
 
김금희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복자에게』는 제주를 배경으로 한다. 지금, 여기의 공기를 가득 담아 따스하고 강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복자에게』에 대하여 김금희 작가와 나눈 이야기들
 



작년에 단편집 『오직 한 사람의 차지』을 냈고, 올 봄에 산문집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을 출간했습니다. 이번에는 장편소설이네요. 장편소설인 『복자에게』는 어떤 소설인지 간단하게 소개 부탁드릴께요
 
『복자에게』는 유년시절의 친구와 다시 재회하게 되면 어떤 말을 하고 싶고, 어떤 즐거운 일 내지는 슬픈 일들을 함께 나눌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쓴 소설이에요. 제주를 배경으로 했고요. 어린시절 긴밀한 우정을 나누던 영초롱과 복자라는 두 친구가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 어떤 일들을 같이 헤쳐나가는 내용을 담았어요
 
# 제주에서
 
『복자에게』는 제주를 배경으로 한 것이 먼저 눈에 띄는데요. 제주에는 직접 머물렀던 건가요?  
 
제주에 관한 소설을 늘 쓰고 싶었는데, 2018년에 제주도에 한 계절 동안 머물 기회가 있었어요. 그래서 너무 신나게 제주에 가서(웃음) 공간 취재나 인물에 대한 영감 같은 것을 얻을 수 있었어요. 어떻게 보면 『복자에게』는 좀 기적처럼 쓰여진 면이 있어요. 그때 제주에 머물 기회가 없었다면 제주에 대한 소설은 아마 훨씬 나중에 쓰게 되었을 것 같거든요. 다행이에요
 
 
제주를 배경으로 하는 많은 창작물들이 제주도를, 제주에 뿌리내린 현지인이 본 역사적인 공간 아니면 외지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을 위한 힐링의 공간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복자에게』에서는 제주를 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어요.  
 
제가 제주도에 머물 때, 생활인이라기 보다는 그 환경에 대해서 알아가는 사람에 가까웠어요. 그런 제 시선이 소설에도 반영된 것 같아요.
제가 머문 곳은 제주도 중에서도 부속섬이라고 하죠, 제주도에서 다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어요. 문화적인 시설이라고 할게 별로 없었고, 어업 종사자이나 해녀분들이 터전을 잡고 생활을 꾸려가는 곳이죠. 그런 제주를 경험하다 보니까 일하는 사람들의 섬으로서 제주를 생각하게 되었어요. 제주 본섬에 나가서 취재를 하면서 보니까 젊은 세대가 많이 이주를 해서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있었고, 식당 같은 곳에 가면 외국인 노동자분들도 많았어요. 그런 장면들이 저에게 일하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던 것 같아요
 
 
제주에 머무는 동안, 어떤 것이 인상적이었나요
 
모든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저는 내내 도시에서 살던 사람이라 더 그렇게 느꼈던 것 같은데, 제주도는 정말 자연의 힘이 세세하게 느껴지는 공간이었어요. 일단 집 밖으로 몇 걸음만 걸어나가면 파도가 세차게 일렁이는 바다가 펼쳐져요. 방파제를 수많은 갯강구들이 새카맣게 덮으면서 '나도 여기 살아있어!'를 외치는 곳이었고요
제가 머물던 섬이 남쪽섬이어서 그런지 빛 자체도 달랐어요. 굉장히 강하고, 빛의 색깔 조차 다르게 느껴지더라고요. 처음에는 약간, 내가 세트장에 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리고 제주도에서 생활하시는 분들이 정말 정이 많으세요. 그 정을, 젊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살갑게 표현하는게 아니라 배경처럼 있다 적재적소에 필요한 도움을 주시더라고요. 제가 섬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평소 저에게 잘 해주시는 동네분이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손으로 자전거를 세우시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멈추니까, 갑자기 자전거에 기름을 칙칙 뿌려주셨어요(웃음). 제가 감사합니다, 인사하니까 '' 그러면서 아무 일 없던 듯이 가버리시고요(웃음).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데 나서서 도움을 주시는 모습에 어떤 믿음직스러움이 있어요. 그곳에서 저는 마치 아이 때로 돌아간 것 같았죠
 
 
공동체라는 것이 지나치게 강하게 결속되면 폐쇄적이 되고 답답함과 구속을 느끼게도 하잖아요. 그런데 『복자에게』에서 만나는 제주의 공동체는 간섭과 통제가 아니라 무심해 보이면서도 꼭 필요한 만큼의 도움을 주는 그런 모습이더라고요
 
제주에서는 뭘 하려고 하면 다 육지에서부터 건너가야 해요. 공사를 하려고 하면 자재나 장비, 인부들까지 다 육지에서 가야 하는 거죠. 그만큼 대부분의 일상에서는 자족의 기능을 반드시 갖춰야 하는 섬이에요. 그러다보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연대감이 당연히 도시보다는 훨씬 강해요.
그런데 요즘은 제주로 이주한 사람도 많고 젊은 분들도 많다보니, 어떻게 보면 결속감은 약간 줄어드는 것 같지만, 그러면서 균형이 맞춰져서 적절한 수준의 공동체를 유지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제가 완벽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주가 그렇게 변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어요.  
 
 
제주어가 많이 쓰여졌는데요. 솔직히, 정확히 못 알아듣는 것도 많았어요(웃음). 하지만 서울말로 풀어서 쓰지 않은 것이 저는 더 좋더라고요. 외국 여행 가면 정확히 해석은 안 되지만 대충 들리는 한 두 단어로 어떻게 어떻게 이해하고 소통하는 그런 기분이었거든요(웃음). 
 
쓸 때는, 사실 번역하듯이 썼어요. 제가 쓰고싶은 말을 저에게 익숙한 말로 쓴 다음에 그걸 제주어 사전이나 문법책을 보면서 번역하듯이 바꾸는 거죠. 다행히 편집과정에서 제주 출신 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더 실감나게 고칠 수 있었고요
처음에는 문장의 뜻을 풀어줘야 하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어요. 그런데 편집자님도 그렇고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서 독자들이 생각하면서 읽는게 더 좋을 것 같다라고 말씀해주셔서 뜻풀이는 넣지 않았어요. 그래도 나름 맥락상 유추할 수 있도록 썼는데 그게 잘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제주어, 너무 예쁘고 굉장히 다양해요. 그래서 제주어사전 같은 걸 읽는 일이 너무 즐거웠어요. 풍부한 말의 재미 같은 걸 느낄 수 있는 좋은 작업이었어요. 제주어 더 알고 싶어요. 더 공부해보고 싶어요
 
 
# 건강하게 반짝이는 사람들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이름'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요. 영초롱, 복자, 고오세, 이런 이름들은 유니크한데 그렇다고 너무 딴세상 사람 같지는 않아요
 
'복자'는 제목에도 나오는 이름이라 소설을 쓰는 초반부터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사실상 강인한 사람, 미래에 있을 어떤 희망에 대해서 여전히 믿고 있는 사람의 이름으로 쓰고 싶었어요
'영초롱'은 굉장히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인물인데요. 그러면서도 뭔가 밝은 기운을 가진 이름이면 좋겠다 생각하던 와중에 갑자기 떠올랐어요. '고오세'도 갑자기 떠올랐는데, 왠지 오름을 닮은 이름이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오름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 같은게 있잖아요. 약간 삭막하게 느껴지면서도 푸른 것들이 자라고 있어서 몸과 마음이 순해지는, 그런 이름이 없을까 하다 갑자기 그 이름이 떠올랐죠. 제주에 가장 많은 성씨 중 하나가 고씨고요
 
 
복자와 영초롱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생각보다 많은 분량은 아닌데, 임팩트가 있어요. 
 
유년시절의 이야기를 길게 쓰면 좋은데, 그러다보면 끝이 없을 것 같더라고요(웃음). 이 소설에서 과거는 현재적 사건들 속에서 인물들간의 관계를 이해하게 하는 팁, 이후 일어나는 갈등에 대해서 이해하게 하는 장치거든요. 그래서 속도감 있게 진행시키고 현재 이야기로 넘어가게 되었어요
그리고, 모두에게 유년의 경험이 있잖아요. 각자 경험한 유년의 감정을 떠올리면 길게 쓰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독자분들을 믿었죠(웃음). 
 
 
복자와 영초롱의 우정이 깨지는 과정이, 짧지만 인상적이었어요. 어른들 눈에는 뭐 그런 별 거 아닌 걸로 싸우고 그러냐 하겠지만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정말 중요한 일이잖아요. 아이들의 세계를 깨뜨리는 건 무심한 어른들이라는 것, 그 영향은 정말 크다는 것, 어른들은 아이들의 세계가 존재하는지도, 그걸 무심하게 무너뜨렸다는 걸 모른다는 것도 조용한 비극인 것 같아요
 
아이는 마음이 여리고 순하고 그러니까 꺾였을 때 상처도 더 커요. 어른들은 지각이 발달한 이후의 관계가 더 깊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유년의 관계는, 언어로 표현하지 않아도 모세혈관처럼 서로 서로 엮여있다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작은 상처가 나도 그 영향이 오래 가고 아이 마음에 질문을 남기죠.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감정은 무엇이었지?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는 것도 있지만, 제 경험을 보면, 어떤 것들을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의문을 남기거든요
소설 속에서 영초롱과 복자는 어린 시절 이별을 하게 되고, 그와 비슷한 일이 커서도 다시 반복이 돼요. 어린 시절의 상처와 어른이 된 후의 상처가 닮아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죠
 
 
이영초롱은 판사입니다. 법정 드라마에 나오는 정의로운 판사가 아니라, 굉장히 현실적인 직업인으로서의 판사더라고요. 영초롱을 판사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묘사할 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는 부분도 있었을 것 같아요.
 
영초롱의 직업을 정하지 못한 상황일 때 법원에서 하는 강연에 초청받아서 갔어요. 강연 후 질의응답 시간 때 참여하신 판사님들과 대화를 했는데, 직업적인 토로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그게 인간적으로 느껴졌어요
사실 저는 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판결을 내리는 판결자'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마음에 갈등이 많더라고요. 같은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에 대해 판결해야 하는 것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도 있고, 인간이기에 느끼는 나약한 감정들도 있고요. 그런 이야기들을 진짜 홀린 듯이 들었어요(웃음). 판사님들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뭔가가 만들어지는 느낌이었죠. 이제 30대가 된 젊은 판사를 주인공으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재판정에 들어서서 사건을 해결하는 그런 익사이팅한 모습이 아니라, 재판을 끝내고 돌아서서 사무실로 돌아갈 때의, 그런 뒷면을 그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등장 인물들 하나하나가 다 반짝거림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고오세가 너무 좋아요(웃음).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꼬이지 않고 건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잖아요
 
제 주변에도 '오세앓이' 몇 분 계세요(웃음). 어떤 어려움을 만나면 그걸 감정적으로 받아들여서 누구나 약간 꼬이는 마음이 생기거든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오세는 그걸 빨리빨리 털어내는 스타일이에요. 거기에는 건강한 유년을 보낸 것도 한몫 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생활력 있는 인물이죠.  
 
 
복자는 그런 사람인 것 같아요. 어려움을 겪었기에 더 많이 웃고 더 씩씩하고 진취적인 그런 사람, 자기를 들여다보면서도 타인에게 관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요. 성장 환경이 순탄치 않은 복자가 그렇게 건강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해녀일을 하시는 복자 할머니 덕이 큰 것 같아요.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거기서 큰 힘을 받아서 인생이라는 항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 역할을 복자의 할머니 - 제주어로는 할망이라고 하는 -가 해 주셨고요. 복자에게 계속 긍정적인 얘기들을 해주시죠. 이겨낼 수 있다, 너는 별 같은 인생을 살아라, 그런 얘기를요. 복자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현실을 헤쳐나갈 수 있었던 힘은 거기 다 들어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복자 할머니을 비롯한 제주도의 여성들매력있었어요. 강인하고 드세지만 은근 유머가 있고, 규율은 있지만 귄위의식은 없는 모습들이요
 
제가 실제로 받은 인상은, 굉장히 열려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제주의 풍광만큼이나 자연스럽고, 강하고, 쿨하세요. 할 말 다 하고 당차시고요. 해녀분들은 70대가 되어도 물질을 하시는데, 자기 능력에 대한 확신 같은게 있어 보였어요. 오랫동안 자기 직업을 해온 사람이 가지는 포스가 있어서 앉아만 계셔도 포스가 막(웃음). 
 

 
# 미안함 그리고 실패에 대하여
 
어린 영초롱과 함께 살게된 정희 고모의 말 중에 인상적인 말이 있었어요. "마음에 미안함이 인다면 그것만은 간직하고 살아가렴. 미안함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감정이니까."
분명 많은 사람들이 '미안함'을 느끼지만 그걸 감추기 위해 상대를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같아요. 그리고 '미안함'을 빨리 떨쳐버리고 싶어하고요
 
살면서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일들이 있죠. 누군가에게 미안하게 되는 순간도 많고요. 그 미안함을 간직하고 산다는 것은 사실 책임을 진다는 것이거든요. 미안함에 짓눌릴 필요는 없지만 자기가 행했던 어떤 과오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걸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함으로써 자기 인생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정희 고모는 말을 해요정희 고모는 대학시절 친구가 누명을 쓰는 현장에서 자신이 했던 일들에 대해서 평생 책임을 지고 싶어해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을 거에요
 
 
사람의 마음에 남은 그런 미안함들이, 영초롱을 화해와 치유로 이끌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뒷부분의 주요 사건인 간호사들의 산재사건 소송에서, 이 소송에서 아무런 이득이 없는 환자와 환자 가족들이 간호사들을 위해 몇 년 전 진단서와 처방전을 찾아주는 일 역시 그런 '미안함'에서 온 것 같고요
 
타인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 일을 같이 해결해주기 위해 손을 보태는 일이잖아요. 그게 큰 일은 아니더라도 절박한 누군가에게는 정말 큰 도움이 되거든요. 그건 소설적인 설정이지만 그런 선의 하나로 살아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영초롱은 끊임없이 실패하는데요. 가족관계도, 우정도, 사랑도, 일도요. 하지만 그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영초롱의 미래가 어둡고 막막하고 비관적인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살면서 실패를 맞는 순간들이 굉장히 많죠. 실패는 어린 영초롱과 복자가 바닷가에 서서 낚시하면서 맞는 바닷바람 같은 거에요. 살면서 계속 반복되거든요
실패하는 그 순간에는 기분이 가라앉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다시 방향을 찾게 되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해요. 이 책을 읽는 분들도 실패의 경험에 완전히 잠식당하지 않고 거기서 걸어나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어요
 
 
한 번의 실패로 인생이 결정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태도들이, 은근히 많아요.
 
사회가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죠. 수능이든 어떤 시험이든 그걸로 뭔가 현실이 고정되어 버리는 느낌이 있거든요. 여러 번의 기회를 주고 그 여러 번의 시도에서 낸 결과를 가지고 판단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게 안타까워요.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보면, 그때의 실패가 사실 완전히 망한게 아니라 방향을 트는 톱니바퀴 같은 역할을 했다고 느껴지기도 해요. 저도 20대 때 임용고시를 준비했지만 떨어졌고요. 회사에 면접을 보러 다니면서도 많이 떨어졌고요. 작가가 되고 나서도 투고를 했지만 또 떨어졌고요(웃음).  물론 그 순간에는 많이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길이 생기고 길이 생기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계속해서 열리는 길에 대해서, 조금 더 믿어도 될 것 같아요.
 
# 사회적 공기 속에서
 
영초롱은 직접 사회적 이슈들에 참여하지는 않아요. 사회문제에 크게 관심있는 사람인 것 같지도 않고요. 하지만 영초롱이 그런 이슈들과 전혀 무관하게 살 수는 없더라고요. 정희 고모의 과거, 제주도로 오게 된 상황, 맡게 된 소송건이나 사법 농단과 블랙리스트 같은 현실의 사회적 이슈들이 어떻게든 영초롱의 삶에 밀려들고요.
 
사회적 공기라는 것이 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커요. 그 이슈에 나는 의견 표명을 하고싶지 않아, 라고 생각하는 순간 조차도 사실은 의견을 표명하고 있는 것에 가깝거든요. 소설 속 인물들도 그런 사회적 격랑들을 배경으로 삼아서 인생을 살아가게 되고요
그런 점이 가장 두드러지는게 정희 고모의 삶인 것 같아요. 이 사회가 공정성을 잃을 때, 불의를 쉽게 용인할 때개인의 삶이 얼마나 크게 파괴되는지를 그리고 싶었거든요
 
 
소설의 중심에 놓인 복자의 소송이 결과적으로 이겼는지 졌는지는 스포일러니까 얘기는 안 하겠습니다(웃음). 하지만 모티프가 되었던 제주의 한 의료원에서 일어난 산재사건은 8년의 투쟁 끝에 여성노동자들이 결국 산재 인정을 받았더라고요. 
(이 사건은 제주의료원 소속 간호사들이 임신 중 수행한 업무로 인해 태아 건강이 손상된 것에 대해 업무상 재해를 인정해달라는 소송으로, 2020 4 2심에서 업무상 재해로 인정을 받았다.)
 
제가 모티프를 얻은 그 사건에 대해서도 독자분들이 좀 더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긴 세월 동안 투쟁을 해서 재판에서 이겼는데, 그 산재 사건 재판이 중요한 이유가 있어요. 나중에도 비슷한 소송이 있을 때 이 사건 결과가 참조가 되거든요. 어떻게보면 그분들이 하나의 산을 넘어주신 거죠.  
 
소설을 구상할 때는 현실에서 소송의 결론이 아직 나지 않는 상황이어서 이걸 어떻게 소설로 그릴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재판에서 이겼어요. 모티프를 얻은 사건이긴 하지만 결과를 보니 쓰는 마음이 좀 더 강인해지는 것 같더라고요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난히 이기는 것, 이걸 보는 것만해도 사실 굉장히 위안이 돼요. 현실에서는 그게 쉽지가 않지만요
 

 
# 편지와 말들
 
소설 속에서는 '편지'가 자주 등장해요. 요즘은 편지보다는 전화, 문자, DM으로, 생각나는 말을 바로바로 전달하잖아요. 편지는 고심해서 쓰고, 망설이다 결국은 보내지 못하기도 하고요. 편지는 소중하게 전달하고 싶은 마음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매체인 것 같아요
 
저는 어렸을 때 친구들하고 주고받은 편지들을 다 가지고 있어요. 그때는 편지를 정말 많이 썼거든요. 휴대폰에 익숙한 세대는 이해가 안 가겠지만, 방학 때면 친구에게 편지로 안부를 물었어요(웃음). OO, 방학 잘 보내고 있어? 이렇게요(웃음). 오랫동안 생각해서 편지를 쓰고, 3~4일 걸려서 전달되고, 다시 답장을 받기까지 나의 인생이 흐르고 흐르고 하는, 그런 느린 소통의 진중함 같은 것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소설에 편지를 넣었어요. . 
똑같이 언어로, 문자로 소통하는 것이지만 문자메시지와 편지는 느낌이 사뭇 다른 것 같아요. 시간 감각의 차이일까요? 시간에 대한 감각이 빠를수록 쉽게 판단하고 쉽게 내뱉게 되는데, 그러면 마음을 다치는 경우도 많잖아요. 약간은 느린 템포가 필요할 때도 있지 않을까요
 
 
마지막 장은 팬데믹 시대에 복자와, 그리고 독자들에게 보내는 인사 같았습니다. 마지막 장은 언제 쓰셨나요? 코로나 시대의 영향으로 원래 구상에서 변경되거나 수정된 부분이었나요
 
영초롱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재판에서 빠져나온다, 정도로 줄거리를 정해놓긴 했지만 영초롱을 그렇게 멀리까지 보낼 생각은 없었어요(웃음). 그런데 그 부분을 쓰는 과정에서 팬데믹이 왔고, 이 팬데믹 상황을 쓰지 않는다는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어요. 올해 초, 우리가 받은 충격이란 것이 너무 컸잖아요. 그 상황을 그대로 투사해서 쓰고 싶었고, 이미 그렇게 쓰고 있더라고요
밖에 나갈 수 없고, 만날 수 없고, 어디쯤에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은, 만성적인 그리움의 상태인 것 같아요. 그것이 지금 팩데믹 시대의 감정이자 복자, 영초롱, 오세, 정희 고모, 그런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을 아우를 수 있는 감정선인 것 같기도 했고요
 
 
『복자에게』를 읽으면서, 따로 적어놓고 싶은 문장들이 많았는데, 저는 일단 3개를 뽑아봤어요
 
"마음에 미안함이 인다면 그것만은 간직하고 살아가렴. 미안함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감정이니까."
"아빠가 실패해서 아빠를 미워했어. 그런데 그러면 나는 아빠가 아니라 실패를 미워한 셈이라는 생각이 들어."
"글쎄, 그런 건 인생을 더 깊이 용인한다는 자세 아닐까?"
지금 작가님께서 뽑아본다면, 어떤 문장을 고르실까요
 
'작가의 말'에서는 나는 실패를 미워했어, 라는 말을 선택했는데, 지금은 "인생을 더 깊이 용인한다는 것"을 선택하고 싶네요
저도 잘 못하고 있긴 하지만, 용인하는 태도 자체가 자기를 해방시켜주는 면이 있어요.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품을 넓혀야 해요. 그 품을 넓힌다는 것이 사실 엄청 어려운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좀 더 용서해주는 일이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그럴 수 있었어, 그렇게 한 번 더 말해주는 그런 태도같은 거죠. 책에서는 약간 어려운 볼테르까지 끌어들이긴 했지만(웃음) 결국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용인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이해해주는 것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문장을 선택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부탁드려요.
 
지금 굉장히 어려운 시절이잖아요. 하지만 이 시절을 지나고 돌아본다면, 힘들긴 했지만 특별한, 서로에 대한 연대감을 확인할 수 있었던 어떤 시절로 기억하게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좀 더 기운 내시고, 무엇보다 건강하고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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