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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철학자 이진경과 함께 읽는 니체

  • 20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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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만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 『우리는 왜 끊임없이 곁눈질을 하는가』
 
 
시대와 공감하는 철학자 이진경의 니체 강의가 ‘니체의 눈으로 읽는 니체’ 시리즈로 독자들과 만난다. ‘니체가 바라는 독해란 이런 게 아닐까’. ‘말 그대로 삶을 위한 강의’라는 수강생들의 호평 속에 이어졌던 강의답게 공부하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일상에서 무기이자 도구로 쓸 수 있는 니체의 철학을 소개한다. 사랑할 만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에서는 『선악의 저편』을, 우리는 왜 끊임없이 곁눈질을 하는가』에서는 『도덕의 계보』를 함께 읽는다.
 
그 안내자를 자처한 저자 이진경은 삶의 아마추어다. “진정한 잡학이 전공이라는 자기소개답게 아직까지 그에게 공부란 아마추어처럼 미쳐서 하는 것’, ‘진짜 좋아서 하는 것이다. 이번 책에서도 철학서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문학, 영화, 건축, 과학, 종교 등 온갖 분야를 넘나드는 생생한 사례를 엿볼 수 있다. 그 폭넓은 관심사가 단순히 교양이나 박학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과거의 선사들이 화두라고 했을 법한 나름의 물음을 갖고, 중요하지만 쉽사리 해결될 수 없는 그 물음의 답을 얻기 위해 여기저기 유랑하며 살아가는 셈이다. 이번에 그가 택한 행방은 니체에 있다.

 
 
그간 30여 권 이상의 책을 쓰시면서도 전면으로 니체를 다룬 책은 처음 내셨습니다. 오래 전부터 니체를 공부하고 가르치면서도 이제야 니체에 관한 책을 내게 되신 이유가 있나요?
 
2002노마디즘이란 책을 내면서 남들 사상 정리하는 건 이제 그만하자고 마음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제 자신의 사유를, 제 나름의 철학을 하고 싶다는 욕망, 그럴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 같은 게 생긴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 뒤에 쓴 책이 맑스의 자본에 대한 책이었습니다(자본을 넘어선 자본). 스스로의 결심에 반하는 일종의 아이러니를 행한 셈이지요.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 익숙한 철학자 맑스의 자본을 수많은 해설서 중 하나가 아니라, 전혀 낯설고 새로운 책으로 다시 쓸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덕분에 이를 정통적 입장에서 비판하는 책이 하나 나오기도 했지요. 저는 오토독스, 즉 정통적 해석에 반하는 패러독스를 쓰고자 했던 셈인데, 성공했다 싶었어요.
 
누군가에 대한 책을 쓴 것이 이처럼 독자성을 갖게 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해석이 쓴 사람의 사유라고 할 독자성을 갖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니체에 대해 이제야 쓰게 된 것은, 이제야 니체에 대한 제 나름의 해석이 제 발로 섰다는 말이겠지요. 특히 우리는 왜 끊임없이 곁눈질을 하는가는 니체의 눈으로 니체를 읽는 내재적 비판의 방법을 사용하여, 니체를 니체적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니체를 읽을 때 느끼는 곤혹스러움을 넘어서 니체를 영유하고 이용할 수 있는 책이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에서 가장 와닿았던 문장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그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이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선악의 저편)는 문장이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는 괴물과 싸우다 비슷한 괴물이 되는 경우가 많지요. 이렇게 되면 싸움의 이유가 아무리 정당해도 싸우지 않은 것만 못한 게 됩니다.
약속할 수 있는 자가 되라”(도덕의 계보)는 문장도 좋아합니다. 자기자신을 지배하는 자, 자신 안의 자유의지들을 하나의 의지로, ‘주권으로 바꿔낼 줄 아는 자가 되는 것, 그것은 니체가 도덕의 계보를 연구하여 얻은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도덕이나 풍습이 사용하는 잔혹한 기억의 기술이나 반동적인 목적으로 사용된 사제의 기술들조차 약속할 수 있는 자, 주권적 개인이 되는 데 사용할 수 있다면 성공한 것입니다. 도덕의 계보에서 금욕주의나 도덕에 대한 비판이 부정적인 것을 겨냥할 때조차 부정적이지 않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요즘 벌어지는 이슈를 보면 혐오와 차별이 난무하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니체의 철학이 고귀한 자가 되는 것을 넘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더 나은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요? 불평등이 줄어들고 모두가 먹고살기 편해진 사회? 대동단결해 분쟁이 사라진 사회? 모두 좋은 사회겠지만, 불화나 이견이 없는 사회 같은 건 있을 수 없습니다. 가족 안에서도, 연인 간에도 얼마나 많이 갈등에 시달립니까? 좋은 가족, 좋은 연애관계는 그런 불화와 이견을 편하게 드러내고 쉽게 해결책을 찾는 관계입니다. 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혐오나 차별이 문제인 것은 어떤 차이에 서로 공존하고 감당할 수 없는 끔찍한 무게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니체라면중력의 영이라고 부를, 모두를 난쟁이로 만드는 무게입니다. 그래서 혐오와 차별이 만연한 사회는 작은 차이도 견디지 못해 쳐내고 욕하고 비난하는 자들로 넘쳐나게 됩니다. 책에도 반복해서 썼지만, 강하다는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고 수용할 수 있는 이질성의 폭이 크다는 말입니다. 고귀함이란 남들이 추하다고 하는 것에서마저 아름다움을 보고 자신의 취향 안에 수용하는 능력 같은 것입니다. 그런 능력이 크면 같이 사는 분들, 이웃한 이들이 편해집니다. 부자인데도 쫓기듯 돈에 매달려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해도 자기보다 더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수용하며 함께 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사는 사회가 더 좋은지는 말할 것도 없지요.
 
 
약자들로부터 강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니체의 주장은 통상적인 관념과는 반대되는 듯한데요, 지금 이 시대에 흔히 그렇다고 여겨지는 강자와 약자 개념 또한 이에 따라 재정의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권력이나 돈으로 남들을 좌우하고 못살게 구는 이들을강자라고 하고, 그 반대편에 있는 가진 것 없는 자들을 약자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니체에게 강함과 약함이란 힘의 양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힘의 질과 결부된 것입니다. 강함이란 능동적인 것이고, 약함이란 수동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강자란 무언가 시작할 수 있는 자입니다. 약자란 지배적인 가치에 복종하는 자입니다. 가령 모차르트의 삶을 다룬 영화 「아마데우스」를 예를 들자면, 모차르트는 끊임없이 새로운 걸 창안하고 시작하는 강자입니다. 반면 살리에리는 권력에 가까이 있지만 그저 유행하는 스타일, 지배적인 스타일에 따라 사는 자이지요. 대부분의 궁정귀족 역시 살리에리와 같아서, 모차르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살리에리는 약간의 술수만으로도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 정말 약자들로부터 강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새로운 것을 창안하는 자는 대부분 동시대인들에게 이해받지 못합니다.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기존의 것에 머물러 있는 이들로선 이해할 수 없는 걸 시작하는 것이니까요. 가난과 고독이 창조적인 인물 가까이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강자,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자, 시작하는 자를 알아보는 눈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살리에리처럼 진정한 강자를 핍박하고 억압하는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니체를 읽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거리의 파토스를 설명하시면서 남들과 다른 나만의 감각을 긍정하고 그 생각을 멀리 밀고 나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연대고립의 경계를 구분하는 선생님만의 기술이 있을까요?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전후 일본의 사상가 다니가와 간은연대를 구하되 고립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했고, 이는 일본의 학생운동인 전공투의 모토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저는 거리의 파토스란 개념을 특이성의 긍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남들과 다른 어떤 감각이나 생각을 긍정하는 것, 그것을 다른 이의 특이성과 결합하여 새로운 특이성을 구성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삼각형에 수많은 점들이 있지만, 삼각형의 특이성을 표현하는 점은 세 개뿐입니다.
 
작년에 출간한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에서 이에 대해 이렇게 쓴 적이 있어요. ‘언제나 특이점이 되는 방식으로 존재하라.’ 그런데 특이점은 다른 특이점과 모여 특이성을 구성합니다. 모든 특이성이 좋은 것은 아니지요. ‘좋음/나쁨이라는 니체-스피노자적 윤리학의 개념이 작동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구성하는 특이성이어떤 특이성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좋은 특이성을 형성하는 특이점이 되도록 존재하라고 할 수 있겠지요. 더 나아가, 아무리 좋은 특이성이라고 해도 거기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다른 특이성을 창안하는 것, 새로 시작하는 힘을 가동시켜야 하지요. 그래서 하나 더 추가해야 합니다. ‘어떤 특이성에도 머물지 말라.’ 특이점의 존재론이라고 저는 말하는데, 그 존재론의 윤리학적 명제들인 셈이지요.
 
 
'니체의 눈으로 읽는 니체' 시리즈 3권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강의라고 들었습니다. 1권이 사랑할 만한 삶에 대한 것, 2권이 주권적 개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것이라면, 3권의 주제는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요?
 
2권의 주제는 필로비오스’, 즉 삶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란 점에서는 주권적 개인으로 사는 방법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3권은초인’, 즉 넘어서는 자에 대한 것, 초인이 되는 방법, 초인으로 사는 방법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이론적 개념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1권은 삶에 대한 문제설정, 2권은 힘에의 의지란 개념을 중심 테마로 하고 있고, 3권은 영원회귀에 대한 것이 될 것이라 해도 좋을 듯합니다.
 
덧붙이자면, 니체의 여러 저작 중에 세 권을 골라 쓰겠다고 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권의 목표가 철학을 필로비오스, 즉 삶에 대한 사랑을 위한 도구로 만들려는 니체의 문제의식을 갖고 삶 속으로 침투하는 길을 찾는 것이었다면, 둘째 권의 목표는 힘에의 의지 개념을 통해 이런저런 사태를 보고 평가하면서 반동적이고 부정적인 삶을 넘어서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었지요. 세 번째 책은 영원회귀 개념을 통해 니체의 사유를 존재 자체를 향해 최대치로 밀고 나가고, 자기를 반복하여 넘어서는 자로서의 초인에 대해, 그 초인의 삶이 바로 여기 현실의 삶임을 보여 주는 것이 될 거 같습니다.
 
니체 생각대로, 책을 읽는 것, 사유를 하는 것은 삶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니체의 눈으로 읽는 니체시리즈는 충분히 니체적인 책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읽는 분들이 그렇게 읽어 주고 사용해 줄 때 완성될 겁니다. 제가 반을 했으니, 여러분이 나머지 반을 맡아, 노래와 춤이 흘러나오는 삶, 나뿐 아니라 남들도 즐겁고 평온하게 해주는 삶이 퍼져가게 되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감사합니다.
 
 
| 기사 및 사진제공_엑스북스
 
 
사랑할 만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 [인문]  사랑할 만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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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끊임없이 곁눈질을 하는가 [인문]  우리는 왜 끊임없이 곁눈질을 하는가
이진경 | 엑스북스(x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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