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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말을 넘어 공존의 사회로『말이 칼이 될 때』홍성수

  • 2018.02.13
  • 조회 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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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말일 뿐이라고 한다. 듣고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특별히 손해를 입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싫은 걸 싫다고 하지도 못하냐고, 이 나라는 표현의 자유가 없는 나라냐고 목청을 높인다. 나는 상처 입었는데 왜 그냥 웃어 넘기지 못하냐고 오히려 비난을 받는다. 그 말들은 칼이 되어 마음 속에 상처를 내고, 오래된 상처를 헤집어 놓고, 자꾸 상처를 덧나게 해 아프게 한다.
 
특정 집단 또는 개인에 대한 모욕적 표현이나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말들, 혐오표현의 문제를 이제는 진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혐오표현에 대한 문제에 오랫동안 천작해온 숙명여자대학교 법학과 홍성수 교수의 『말이 칼이 될 때』는 혐오표현이란 무엇이며 왜 문제가 되고, 또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어떤 방향으로 풀어가면 좋을지를 종합적으로 다룬 책이다. 차별과 혐오의 사회를 넘어 공존의 사회로 가기 위해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 '혐오표현'에 대해 홍성수 교수와 이야기를 나눴다.  
 

 
'혐오'에 대한 개념을 잡는 것도 쉽지는 않은데, '혐오표현'이라는 건 그보다 더 복잡한 것 같습니다. 단순히 누군가를 차별하고 비난하는 말이라고 하기에 얽혀있는 것들이 많고요.   
5년 정도 혐오표현에 대해서 강연도 하고 언론 인터뷰나 기고도 많이 해왔어요. 하지만 혐오표현 이슈는 복잡한 문제라서 짧은 인터뷰나 글, 심지어 두 시간짜리 강연으로도 오해없이 내용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런 아쉬움 때문에 책이라면 혐오표현의 개념부터 의미, 대안까지 한 번에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죠. 혐오표현은 학술적인 주제이기도 하지만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데다 대중적인 관심도 있는 주제다 보니 대중서 형태로 집필을 하게 되었습니다.
 
혐오표현을 둘러싼 일상의 논쟁을 보면 흔히 '이게 왜 혐오표현이냐' '듣는 쪽에서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거다'라는 말이 꼭 나오거든요. 같은 말이라도 누구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말이 혐오표현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요.
"정신장애인은 범죄를 저지를 수 있으니까 집에만 있어야 한다"고 하면 정신장애인들은 외출했을 때 혹시 정신장애가 있음을 드러나면 해를 입을까 굉장히 불안하고 두려워해요. 하지만 비장애인에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으니 나가지 말아라"라고 하면 그냥 웃고 말겠죠. 같은 말이라도 누구에게 하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른 의미에요. 직장에서 여성에게, "집에서 애나 봐라"라고 하는 거랑, 남자직원에게 "애나 봐라"라고 하는 것도 사회적 효과가 완전히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핵심 주제입니다.
 
효과가 다른 이유는, 기존에 차별을 받아왔고 지금도 차별을 받고 있고 앞으로도 차별 받을 가능성이 있는 소수자 집단에게는 그런 말들이 단순히 부적절한 말, 기분 나쁜 말로 들리는 게 아니기 때문이요. 기존에 받아왔던, 누적되어왔던 차별들이 그 말을 계기로 폭발하게 되는 것이죠. 똑같은 말이라도 소수자에게 했을 때 완전히 다른 맥락이 형성되고 다른 효과를 낳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혐오표현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단어 하나만 놓고 이 말이 혐오니 아니니 따지는 건 크게 의미가 없겠네요.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 말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봐야 하는 거니까요.
실제로 이런 이런 말이 혐오표현입니까 아닙니까, 그런 질문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 질문에는 답을 할 수가 없어요. 말이라는 것은 어떤 맥락에서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져요. 사회적으로 절대 하면 안 되는 비난 발언 - 욕설 같은 경우 - 이라도 아주 친한 사이에서는 사용해도 오해가 없는 것과 비슷하죠.
책에서는 사이다 같은 답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게 가능하다면 책에서 분류표를 넣어서 이건 혐오표현이고 저건 아니다, 그렇게 정리를 했겠죠. 하지만 그런 해답 제공은 사실상 불가능해요. 그저 이 책이 상황 속에서 그 말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 또는 배경지식을 제공하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으면 합니다.  
 
'혐오표현'이라는 용어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어요. 아주 심각한 차별의 표현이 아닌데도 그걸 '혐오표현'이라고 하니까 더 거부감과 반발이 생기니 순화된 단어로 표현을 하자는 주장인데요.
사회적 강자의 입장에서는 부적절한 표현이라는 건 이해가 가지만 '혐오'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붙이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질 수 있어요. 하지만 바꿔서 생각해보면, 사실 차별적인 발언에 대한 문제제기는 예전부터 있었어요. 이 이슈가 이렇게 화제가 되고 사회적으로 환기된 것은 그 다양한 차별적 발언들에 '혐오'라는, 어떻게보면 굉장히 센 뉘앙스의 말을 붙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일단 어떤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이슈화가 되어야 하니까 어떻게 보면 전략적으로 센 말을 동원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죠.
 
그리고 그 전략 자체가 틀렸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혐오'라는 말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혐오표현' 대신에  '차별표현' '멸시표현'이라고 바꿔서 부르자고 하면 '그래, 말이 되네. 맞아 이런 표현들은 하면 안돼' 이렇게 바로 수긍할까요? 그것도 의문부호라는 거죠. 외국에서도 '헤이트 스피치 Hate Speech'라고 하면 굉장히 뉘앙스가 강한 언어에요.  외국에서도 똑같은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이 문제제기 자체가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죠.
 

누가 들어도 명백히 차별적 발언들도 물론 위험하지만 오히려 객관적인 이야기처럼 돌려서 하거나 반박하기 애매한 낮은 수위의 혐오표현들이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는 건 왜 그런가요?
누가 봐도 명백한 혐오표현에 대해서는 다들 경각심을 가지지만, 약간 애매모호하거나 맥락에 따라서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농담식 표현들에 대해서는 일일이 문제제기 하는 것도 구차한 것 같고 그러다보니 거기에 반박하거나 문제제기를 하기 어렵죠.
 
하지만 그런 말들이 계속 누적되면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되요. 최근 문제가 되었던 영화 속 조선족에 대한 비하들에 대해서, '에이 그냥 재밌으라고 한 건데 뭐' 이러면서 넘어가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건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나 농담이지 대상이 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런 말들이 누적되면 그 집단 전체가 항상 그런 것 같은 고정관념이 생기고, 그런 고정관념이 결국은 차별을 공고히 하는 원인이 돼요. 아무리 수위가 낮고 농담식 표현이라도 극단적인 표현보다 반드시 덜 나쁘다, 덜 위험하다 할 수 없는 것이죠.
 
혐오표현을 접하고 그때 그때 효과적으로 대응하기가 사실 쉽진 않아요.
혐오표현에 대한 개인적인 대응도 의미가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개인들이 알아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돼요. 개인적인 대응을 할 수 있도록 조직적인 지원이 필요하죠. 그 자리에서 대응하지 못했다면 회사나 조직 내의 고충처리기구를 통해 상담을 하거나 도움을 받아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방법들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개인적인 대응과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장치들이 함께 갈 때 시너지 효과가 날 수 있어요.  
 
혐오표현에 대한 논쟁들을 보면, '이건 혐오다, 아니다'로 시작해서 '나는 싫어하는 걸 싫어한다고 말할 자유가 있다'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표현의 자유'라는 문제가 혐오표현에 대한 규제에서도 항상 큰 고민이 되는데요.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가능한 최대로 허용해야 하고 규제 역시 사회의 자율적인 자정 작용에 가능한 맡겨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표현의 자유를 무제한으로 누릴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거짓말을 했다고 처벌을 하진 않지만 거짓말을 해서 타인의 명예를 훼손했거나 속여서 돈을 빼앗는 경우에는 규제를 하는 것처럼요.  

혐오표현에 대한 규제는 논란의 여지도 있고 학자들마다 견해도 다르고, 또 각 나라들마다 이 문제에 대한 대응방식들도 다르기 때문에 복잡하긴 하지만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해요. 이런 부분에서 연구자로서 좀 더 깊이있는 이해를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혐오표현에 대한 규제가 필요한 건 분명한데, 그 기준과 방법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이 필요할 것 같네요.
형사처벌을 하더라도 전체 혐오표현 가운데 굉장히 좁은 범위 밖에 규제할 수 없어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혐오표현 100이 있다면 그 중에 5% 이하만 형사처벌로 다룰 수 있는 문제일거에요. 5%를 처벌함으로써 나머지 95%에 대해서도 '혐오표현은 형사처벌의 대상'이라는 경고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그렇다고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는 95%를 방치해서는 안돼요.  나머지 95%에 대해서는 다른 대처방법을 모색해야 하는데, 너무 형사처벌에만 매몰되면 더 중요한 95%의 문제를 간과하게 되거든요. 95%에 해당하는 혐오표현을 어떻게 규제할 수 있을 것인가 같이 논의해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과 각각의 장단점에 대해서는 책에서 좀 더 자세하게 제시해 보았습니다.
 
혐오표현규제에 대한 입장은 크게 유럽식과 미국식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유럽이 '사상의 자유 시장'에 맡기기엔 소수자가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혐오표현을 규제하여 소수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이라면,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데에는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인데요. 혐오표현에는 "더 많은 표현" "더 좋은 사상으로 맞서는 것" "최고의 복수"라는 미국식 입장이 더 맞는 말처럼 들리긴 합니다.    
미국은 인위적인 규제가 없어도 비교적 자정 작용이 잘 되고 있는 나라에요. 그 어떤 나라보다 차별에 민감하고, 차별적인 발언이 발화되었을 때 민감하게 대응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나라이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우리는 법이 규제하지 않아도 알아서 할 수 있어'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죠.
 
또 한편으로는 그럼 미국에는 혐오표현에 대한 규제가 없는 거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아요. 예를 들어서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서 혼자 혐오표현을 하는 건 규제하지 않지만 똑같은 발언을 교사가 교실에서, 방송인이 방송에서, 회사에서 상사가 했다면 강력한 손해배상과 규제를 하는 나라가 미국이거든요. 또 혐오표현 자체를 규제하지는 않더라도 혐오표현이 차별로 넘어가는 순간에는 그 어떤 나라보다 강한 규제가 있고요.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혐오표현에 대한 규제를 안 한다고 하는 건 정확한 진술이 아닌 거죠.
 
가능하다면 미국식으로 규제하는 것이 이상적이죠. 하지만 한국 사회가 미국 사회만큼 자정능력이 있느냐라고 하면 자신있게 말할 수 없어요. 더 나아가서, 법에 의한 규제를 반대하는 대신 사회에서 혐오와 차별을 몰아내기 위한 자율적인 실천에 동참할 수 있느냐고 하면 그 역시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에요.
 
인식하지 못했던 편견과 차별의 시선들이 어떤 사건이나 분위기 전환을 계기로 급속도로 혐오범죄, 증오범죄로 가시화될 수 있는 것 같아요. 편견이 증오범죄로 돌변하는 순간들을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사회에서 자주 보았고요.    
혐오가 심화되거나 확산되는 전형적인 메커니즘이 있어요. 우선 각 개인들의 처지와 상황이 악화될 때, 악화의 진짜 원인을 찾기 보다는 소수자들에게 화풀이하는 식이 되는 거죠. 또 하나는 이 상황을 정치선동에 능한 정치지도자가 나타나서 이용하는 거죠. 지금 힘들죠? 당신이 힘든 건 저 사람들 때문이에요. 그런 식으로 구도를 잡아가면 혐오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죠. 여기에 그 사회가 소수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수용성이 낮거나 편견이 강할 경우에는 그 선동이 먹힐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죠.
 
한국은 지금까지는 증오범죄가 많은 나라라고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덜 위험한 나라는 아니거든요. 소수자에 대한 수용도가 굉장히 낮은데다 저성장 시대에 각 개인의 처지와 조건이 악화될 가능성이 높지 좋아질 가능성은 낮은 상황이에요. 이렇게 위험성이 많이 잠재되어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이 증오범죄에 대한 예방주사를 맞을 수 있는 적기가 아닐까 생각해요.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이후 수많은 여성들이 보여준 반응들은, 사회가 모르는 척하고 있었지만 많은 여성들이 혐오와 차별의 시선 속에서 공포와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드러낸 것이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은 여성혐오범죄가 아니다, 혐오와 관련없는 범죄라고 말한다면 정말 중요한, 땅 밑에서 흐르고 있는 거대한 용암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요.
현상만 봐도 그렇죠. 아니 왜 멀쩡한 사람들이 나와서 시위를 하고 포스트잇을 붙이고 그랬을까? 그 반응의 실체는 무엇일까?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요. 그곳에 나와 발언하고 포스트잇을 붙였던 여성들은 기존에 조직되어 있는 대중이나 운동가, 이론가, 이런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그 사건을 계기로 평소에 가지고 있던 분노를 폭발시킨 것이죠. 그건 누가 일부러 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 분노의 실체가 무엇일까 같이 고민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이 아닐까 싶어요.
 
혐오표현의 문제는 결국 공존의 사회로 가기 위해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데요. 마지막으로 공존의 사회를 위한 제언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소수자들이 혐오표현으로 정신적 고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권리도 충분히 누리지 못한다는 거에요. 편견과 차별의 시선 때문에 학교 가기가 싫고 직장에서도 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회사 가는 것이 괴로워요. 소수자이기 때문에.
'소수자를 차별하는 안돼' '소수자를 대상으로 증오범죄를 하면 안돼' 여기까지는 모두가 동의하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그런 말을 하면 안돼'까지는 아직 합의되지 못한 것 같아요. 하지만 말은 언젠가 행동으로 옮겨지기 때문에 말 자체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는 혐오와 차별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공존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차별이나 증오범죄를 없애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혐오표현이라는, 말의 수준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공통의 인식기반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박수진 (교보문고 북뉴스)
사진제공_어크로스 출판사
 
 
말이 <!HS>칼이<!HE> 될 <!HS>때<!HE> [정치/사회]  말이 칼이
홍성수 | 어크로스
2018.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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