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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편. 허희의 일기 - 괴테와 필립 로스 그리고 하루키까지

  • 등록일2016.11.22
  • 조회 5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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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저는 단호하게 인생을 정의하는 사람보다는 신중하게 인생에 접근하는 사람을 신뢰합니다. ‘인생은 ~ 이다.’라는 단정형이 아니라, ‘인생은~일지도 모른다.’라는 추측형의 화법을 쓰는 사람이요. 그래서 저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합니다. 예컨대 그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 이렇게 씁니다. “우리네 인생에는 어떤 언어로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 법이죠.” 데뷔작부터 지금까지 그는 순리를 의심하고 역설을 옹호합니다. 가령 이런 식입니다. “어이, 이런 거 엄청난 패러독스라는 생각 안 들어?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하게 돼. 그리고 발견할수록 자기 자신을 상실해 가는 거야.”
 
  소설 속 등장인물 누구의 발화이든 관계없이 이것은 하루키의 일관된 태도이며 그가 아직 정신적으로 노화하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60년 넘게 세상을 산 하루키보다 어린 연배의 어떤어른들은 종종 (실은 매우 자주) 후속 세대에게 자신의 삶을 따르도록 강요합니다. 그 행태에 숨이 막힐 때마다 저는 하루키의 글을 산소마스크를 착용하듯 찾아 읽었어요. 그러면 조금 숨통이 트였습니다. 정답은 이미 나와 있으므로 그곳을 향해서 정해진 길을 따라 열심히 가야한다고 가르치는 사회에서, 하루키는 굳이 거기에 따를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작품을 접하게 되면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편안하게 살기는 어려워집니다. 평탄하게 살려고 하면 눈을 감고 귀를 막아야만 하는데, 그의 작품은 술과 음악으로 매혹하면서 자꾸 이것저것 보고 듣게 만듭니다.
 

  그러고는 캐릭터에 몰입한 독자로 하여금 사랑과 이별을 거쳐 죽음과 방황을 겪게 한 뒤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장으로 이끌어 놓습니다. 가히 하루키 소설의 서사 문법이라고 할 만한 일련의 경로를 체험하고 나면 도저히 예전의 생활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수많은 하루키 애독자, 아니 하루키 중독자의 탄생은 아마 이렇게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평상시에는 자명하다고 인지하지만 실은 불명확한 것들은 도처에 널려 있지요. 따지고 보면 세상에 내던져진 현존재로서의 인간, 우리의 실존부터가 바로 그렇습니다. 예전 국민교육헌장에는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구절이 쓰여 있기도 했다지만, 애당초 목표가 정해진 출생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우선은 그저목적 없는 삶을 살아내야만 합니다. 그것은 마치 과거에는 신이 머물렀다고 알려진, 그러나 현재에는 신이 없는 장소에 가는 순례와 유사합니다. 순례자가 실재하는 신을 찾으려고 순례를 떠나는 게 아니듯, 인간이 명시적인 목적을 추구하려고 살지는 않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도착의 안도보다 중요한 것은 여정의 순간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헤매고 헤매는 방황의 서사인 노르웨이의 숲을 그토록 많은 독자가 찾아 읽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학업·취업·연애·군대 문제 등으로 고민하면서, 이른바 ‘88만원 세대 20대로서 불안하기 짝이 없는 현실을 살아내는 동안 노르웨이의 숲을 되풀이해서 읽었습니다.   
 
  하루키 작품에서는 어떤 사건의 동기가 무엇이었는가를 파악하는 것은 부차적인 일에 불과합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결과의 합리적인 원인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노르웨이의 숲를 쓴 목적을 하루키는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내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이 소설의 간명한 테마입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명확한 이유를 댈 수 있을까요. 어쩌면 진정한 논리는 궤변처럼 들릴 지도 모릅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하나의 시대를 감싸고 있었던 분위기라는 것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동시에 외적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단순히 내밀한 남녀의 연애에만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만나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내는 모든 것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것을 설령 잃어버린다고 해도 그 가치는 퇴색하지 않습니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협소한 의미의 사랑을 조금씩 확장시켜나가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한 지평에서 사랑은 상실마저 수렴하니까요.
 
나는 한때 한 여자를 알았지. 아니, 그녀가 한때 나를 알았다고 얘기해야 할지도 몰라.
그녀는 내게 자신의 방을 보여주며 말했어. ‘좋지 않아요?’라고.
그녀는 내게 그곳에 머물러 달라고 청하면서 어디에든 앉으라고 말했지.
그래서 난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거기에는 의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난 양탄자 위에 앉아서 시름을 잊고 그녀의 포도주를 마셨지.
우리는 두 시까지 얘기했어. 그녀는이제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며 내일 아침에는 일해야 한다고 내게 말하고 웃기 시작했지.
나는 내일 일을 안 해도 된다고 얘기해 주면서 잠자리에 들었어.
내가 깨어났을 때 나는 홀로였고, 새는 날아가 버렸어.
그래서 난 불을 지폈지. 좋지 않아? 노르웨이 숲에서.
 
- 비틀즈, <노르웨이 숲(Norwegian Wood)> 가사 전문
 
  노르웨이의 숲의 주요 화소이기도 한, 영국 밴드 비틀즈는노르웨이의 숲에서 노래합니다. “난 혼자였어, 그 새는 날아가 버린 거야.” 그 새는 대체 어디로 날아간 것일까요? 새가 의미하는 사랑했던 여인도, 젊었던 시절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루키 소설의 구절처럼, 우리는 상실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자기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겠지요.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냉혹한 등가교환의 법칙을 명징하게 증명합니다. 새는 날아가 버렸지만 어쩌면 그 새가 실은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지는 않을까요. 자신을 다시 들여다봄으로써 그 새를 다시 발견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이야기하는 이유라고 봅니다. 미도리가 와타나베에게 묻듯이, 자기만의 새를 찾기 위해 우리도 스스로에게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끊임없이 물어야겠지요.
 
* 본문은 방송 원고 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허희 (문학평론가)
 
노르웨이의 <!HS>숲<!HE> [소설]  노르웨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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