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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단의 조금 깊은 이야기 (2) ― 우리끼리만 중요한 문학의 구분

  • 등록일2015.07.06
  • 조회 7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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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문학에 대한 평가와 대우가 낮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위상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적어도 문단에 속한 이들이 바라보는 장르문학은 함께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다. 사실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어 보이는 게 더 솔직한 모습이다. 비단 나만이 느끼는 현실은 아닌 것 같은데 출판계에서 바라보는 느낌은 어떤지 들어보았다.
 

재미가 없는 한국문학
 
박혜진 : 한국 문학 출판에는 대중소설이라는 판 자체가 없는 거나 다름없어요. 일본의 출판 상황을 보면 1920년대 후반에 나오키 상이 만들어지는데요, 그때 일본이 지금 우리 문학계랑 똑같았어요. 순문학이 쏟아졌지만 정작 독자들은 그런 류의 소설을 읽고 싶지 않아 했죠. 그때 나오키가 대중문학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서 양성화한 거예요. 대중소설이 순문학과 비교해 열등한 것이 아니라 순문학과 즐기는 방식과 포인트가 아예 다른, 새로운 문학이라고 천명한 거죠. 일본 문학이 아직까지도 많은 독자를 점유하고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조영일 : 한국문학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재미가 없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왜 일본소설을 보냐. 일본 작가들의 양력들을 보세요. 문창과 출신들이 없어요. 심지어는 국문과 출신도 없어요. 전공도 다양하고 모두 다양한 일들을 하다가 나중에 문학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글을 쓸 때 독서 경험에 의존하지 않아요. 자기 경험만으로 쓸 거리가 충분하니까요.
 
박혜진 : 평론가들도 획일화되어 있는 편이죠. 대체로 신춘문예나 문예지로 등단하는데, 약력을 보면 거의 다 대학원 재학 중이에요. 아카데믹한 거죠. 아카데믹한 연구를 주된 업으로 삼는 평론가들이 출간되고 있는 작품들의 가치를 규정하고 평가하는수식어를 전담하고 있어요. 신경숙 소설에 대해 말하자면, 신경숙 소설은 누가 봐도 대중소설이에요. 저는 신경숙 작가의 소설이 굉장히 가치 있는 대중소설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문제는 신경숙 소설을 설명할 때 그 작품만이 갖고 있는 공감과 감동의 가치가 아니라 상당한 통찰을 제공하는 문학적 가치가 있다는 식으로 포장을 한다는 거죠. 학자 중심으로 획일화되어 구성된 평론가들, 그런 평론가에게 출판의 핵심 업무를 맡기고 거기 종속되길 자처한 출판 편집자들이라는 두 개의 트러블 메이커가 있어요. 이런 방식이 구조화되어 온 건데, 그걸 독자들이 모를 리가 없죠.
 
김성신 : 문제는 비판할 수 있는 비평의 영역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는 거예요. 작품에 대한 상찬만 남아 있어요. 비평 아닌 것이 비평처럼 남아 있는데 가령 신경숙 문제를 놓고 상징적으로 보면 최초에 스타덤에 올랐을 무렵, 다음 책을 낼 때 작가로 하여금 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치열한 상황에 놓이게 하는 게 아니라 말하자면 둘러싸서 보호해버린 거죠. 두 번 세 번 계속 내도 계속 좋은 평가만 이뤄져요. 어느 순간부터는 작가 스스로 아무렇게나 내도 그 작가적 지위가 계속 유지가 되는 상황으로 들어가는 거죠. 지금 이것은 나태함의 끝판왕 같은 생각이 들거든요. 그리고 이번 표절 문제만 하더라도 사실상 사과하지 않으면서 사과하는 포즈를 취하는 정도의 태도를 취하는 것 자체가 그걸 반증하고 있어요.
 
조영일 : 그런데 저는 문학권력이라는 말을 안 써요. 왜냐하면 문학권력이라고 하면 특정그룹이나 특정인을 지칭하게 되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특정그룹이나 몇 사람을 비판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시스템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만 더 지적하자면, 저는 작품집 뒤에 실리는 해설부터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세계 어느 나라에도 소설집 뒤에 평론가의 해설을 싣는 나라는 없어요.
 
제가 이걸 비판하니까 신형철 평론가가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그때 해설이 독자의 이야기상대가 되어줄 수 있으니 얼마나 좋냐 고 한 바 있는데, 그럴 듯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결론적으로 독자들은 책을 살 때 해설의 원고료까지 내는 거예요. 해설은 어떻게 쓰든 해설이에요. 말 그대로 작품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계몽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요. 기본적으로 독자들을 무시하는 거죠. 그런데 독자는 평론가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무식하지 않아요. 어떤 의미에서 작품의 의미는 더 정확히 읽어내죠. 프랑코 모레티의 말처럼 정전(canon)을 만드는 것은 평론가(대학교수)가 아니라 마켓(독자)이니까요.
 
해설의 기능이 사라진 해설
 
조영일 : 저는 해설도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세계 어느 나라에도 소설 뒤에 평론가가 해설 쓰는 나라는 없어요. 제가 이걸 비판하니까 신형철 평론가가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뒤에 해설이 있으면 평론가와 이야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이게 얼마나 좋은 거냐고 해요. 그런데 결국 독자들은 해설 원고료까지 내는 거예요. 그리고 해설 자체가 독자들을 무시하는 거예요. 독자들이 소설을 제대로 못 이해하니까 비평가가 의미를 가르쳐준다는 의미거든요. 독자들은 그렇게 무식하지 않아요.
 
박혜진 : 관례적으로 들어가는 해설에 문제가 많다는 건 저희도 잘 알고 있어요. 해설이야말로 인맥에 의해 쓰이는 경우가 많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한 책 안에 그 작품을 비판하는 해설을 쓸 수도 실을 수는 없기 때문에, 해설은 무리를 해서라도 의미를 찾아낼 수밖에 없는 공간이에요. 평론가들 입장에서도 해설 하나 쓰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면 신간에 대한 좋은 리뷰를 몇 개는 쓸 수 있을 거예요. 작년부터 민음사는 무조건적으로 해설을 게재하는 방침을 없앴어요. 아직은 해설을 고수하는 작가들도 있어서 없앴다는 게 두드러지지 않지만, 부정적인 결과를 낳고 있는 시스템은 하나둘씩 수정하고 보완해 나가려고 해요.
 
작품 해설 같은, 관습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시스템을 고쳐 나가다 보면 저희도 미치코 가쿠타니처럼 신뢰받는 평론가가 나올 수 있을 거라고 봐요. 미치코 가쿠타니는 《뉴욕 타임스》 전속으로 일하고 있는 일본계 미국 평론가인데, 비평으로 퓰리처 상을 받았죠. 그녀가 재택근무하며 집에서만 일하는 걸 보고 집 밖으로 나오면 돌 맞을 게 뻔하다고 할 정도로 적이 많은 사람이지만, 어쨌거나 부러운 얘기죠.
 
김성신 : 저는 비판 기능 자체가 대중사회에 있어서 뭔가 상업성을 갖는 어떤 시점이 있지 않겠나 라고 생각해요. 가령 정치의 경우는 썰전처럼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대중적 코드를 갖고 거기서 부딪혔을 때 대중은 흥미와 재미를 갖고 소비할 수 있지 않을까... 문학도 비판이라는 기능이 대중에게 눈길을 끄는 상업적 기능과 결합하는 특별한 지점이 있지 않겠냐고 보거든요.
 
조영일 : 그런 식으로 될 필요가 있지요. 문학인도 어떤 의미에서 연예인이 될 필요가 있어요. 힐링캠프 같은 데가 아니라 썰전 같은 곳에서요. 숨어서 지식인코스프레나 할 게 아니라 논전도 벌이고 때론 과장된 제스처도 취할 필요가 있지요. 점잖은 방식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야 홍보효과도 있고 대중과의 접점도 발견할 수 있지요. 그리고 되었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끼리끼리 대충 넘기지 못하게 되겠지요.
 
보다 쉽고 흥미로운 평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왔다. 지금의 평론이나 해설은 일반 독자를 위한 평론이 아닌 작가를 위한 혹은 국문학 전공자나 문예창작 전공자들을 위한 평론이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박혜진 : 비평 자체가 발전하려면 이걸 읽는 독자들이 있어야 하거든요. 독자들이 있으려면 비평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겠죠. 특정 작품에 대한 어느 평론가의 비평이 공격의 대상이 될 때 비평도 긴장감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요. 문예지나 작품 해설만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매체를 활용해서 평론가 각자가 매체가 되려고 노력해야 할 거예요.
 
조영일 : 미국이나 일본처럼 문학이 발달한 나라에서 팔리는 문학을 보면 90% 이상이 대중문학이에요. 원래 대중문학이 주종이고 그 가운데 소위 예술문학을 하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거기서 간간히 베스트셀러가 나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넓은 대중문학의 토대가 순문학을 뒷받침하고 있지요. 우리나라는 반대로 되어 있어요. 한국에서는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대중문학보다 순문학이 더 잘 팔려요.
 
김성신 : 이게 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 독자가 없어지고 지속적으로 상업적 비즈니스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 과정을 거치면서 순문학과 장르문학이 본격적으로 완전히 해체되고 의미 없는 구분이 되는 거죠.
 
박혜진실제로도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고 있어요. 이번에 민음사에서 나온 『한국이 싫어서』는 장강명 작가가 쓴 소설인데, 장강명 작가는 기본적으로 SF라는 소위 장르 문학으로 출발했어요. 지금은 여러 문학상을 수성하며 문예지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받고 있고요. 그럼 장강명 작가는 이제 순문학 작가가 된 걸까요? 대중소설이라는 판이 없기 때문에 이런 극단적이면서 우스운 구분이 계속되는 거예요. 장강명 작가는 앞으로 더 많은 독자를 만들어 갈, 좋은 대중소설 작가라고 생각해요. 그 소설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쾌감의 질을 세심하게 분석해 주는 비평이 필요할 거고, 그런 새로운 비평이 언제 출현할지 기다려 볼 필요가 있겠죠.
 
책을 읽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고 돈도 잘 벌 수 있고 세상 또한 잘 돌아가는 것 같다. 독서 인구는 매해 줄어들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책을 대신할 컨텐츠는 무궁무진하게 쏟아지고 있다. 흥미와 즐거움을 쫓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니 그렇다고 억지로 책을 강요할 수도 없다. 어쩌면 책은 이제 소수 마니아들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무의미한 구분
 
김성신 : 대중의 문학 욕구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국문학이 쇠퇴한 그 자리를 외국문학이 자리잡고 있는 것 아닙니까. 지금 또 들어오고 있는 외국문학을 보면 장르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고. 문학에 대한 수요는 분명히 있어요. 한국문학이 쇠퇴해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독자는 문학을 소비하고 있다고 보고 있거든요.
 
박혜진 : 은행나무 출판사는 스토리텔링에 대한 존중을 공식적으로 표명했고 내부에서도 미디어셀러를 업무화한 걸로 알아요. 위즈덤하우스 같은 경우는 미디어 경험이 있는 프로듀서를 내부 인력으로 소화하기도 했고요. 문학 출판의 방향과 방식을 다양화하는 건 문학을 소비하는 방식을 다양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한 만큼 이런 노력들이 성공적으로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조영일 : 황현산 선생이 트위터에 대충 다음과 같은 것을 올리셨더군요. “좋은 작품을 썼는데 인맥이 없어 출판을 못했다, 이런 말은 거짓말이다. 출판사들은 좋은 원고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작품이 너무 훌륭해서 편집자들이 알아보지 못한다, 이런 말은 사실일 수 있다. 한 세기에 한 번 정도 이런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말이 맞기는 하지만 다른 측면도 있어요. 신춘문예 심사를 하면 소설의 경우 400편 정도가 와요. 그걸 하루 만에 3~4명의 심사위원이 심사를 하거든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한 문단만 보면 좋은 작품인지 아닌지 안다고 하는데, 저는 굉장히 오만한 태도라고 봐요. 물론 그것은 심사위원의 문제라기보다는 신춘문예라는 제도의 문제이지요.
 
문학출판을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환상 중 하나가 바로 완성형 작가의 등장이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저는 70% 정도만 공감을 얻을 수 있다면, 키워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누가? 편집자가요. 작가는 어디서 짠! 하고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편집자와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가는 것이어야 해요. 그런데 한국에는 이런 시스템 자체가 전무하죠. 사정이 이러하니 상금을 1억이나 내건 들 좋은 작가가 등장할 리 만무하죠.
  
박혜진 : 문학을 예술로만 파악하지 않고 상품으로 개발하는 일들이 활발히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다양한 방식으로 문학 작품을 상품화할 수 있는 새로운 직책과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조금씩 등장하고 있거든요? 그런 분들만 아니라 초기 독자를 만드는 사람들의 업무 가치도 폄하하지 않아야 해요. 책이 좋다고 아무리 얘기해 봐야 결국은 읽어 본 사람만 아는 거잖아요. 읽어 본 사람을 늘리려면 그런 일을 하는 사람도 많아져야 하는 거고요.
 
조영일 : 한국문학의 위기를 장르문학으로 타계하자고 해요. 사실 이걸 여러 출판사에서 시도하긴 했죠. 하지만 잘 되지 않았어요. 우리나라 장르문학 작가들 중에도 예외적으로 뜬 작가가 몇 명 있는데, 하나의 흐름을 만드는 데에는 모두 실패했어요. 대부분의 작품은 재미가 없어요. 순문학의 대항마로서 장르문학이 나올 것 같다는 건 허황된 얘기이고. 북스피어 김홍민 대표가 그런 말을 했어요. 자기도 한국 장르소설을 내고 싶다고요. 그런데 막상 원고 들어온 걸 보면 내고 싶은 게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꼭 우리나라 장르문학을 고집할 필요가 있느냐, 수요가 있다면 수입해서 읽으면 된다고 말했다가 국내 장르문학가들에게 엄청 혼났다고 하는데, 저는 순문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수입해서 읽으면 돼요. 왜 우리나라 작가가 쓴 것이 꼭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이 세계화 시대에. 그것을 정부가 지원하는 것도 웃기고요
 
박혜진 : 그러면 MD만 있으면 되게요? 이 위기를 장르 문학으로 타계하자는 게 아니에요. 지금 무수히 많은 대중소설들이 문학성이라는 안 맞는 옷을 입고 있어서 독자들 눈에 안 들어오는 상황이니 맞는 옷을 입게 해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장르 문학이 왜 재미없을까요? 더 많은 사람들이 쓰면 재미있는 게 충분히 나올 수 있는데 그걸 쓸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 전부 사색적이고 이야기 없고 문장 중심적인 소설을 써서 아닐까요? 그렇게 해야 등단할 수 있고 작가가 될 수 있고 책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공모전할 때마다 소설이 얼마나 많이 들어오는지 아세요? 그 많은 인력이 문학성을 흉내 내는 소설을 쓴다고 생각해 보세요. 지독한 낭비죠.
 
조영일 : 장르작가들은 기본적으로 순문학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어요. 어찌 보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왜냐하면 한국에는 그들을 제대로 평가해줄 평론가도 그들을 보호해줄 문단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한두 명의 팔리는 장르작가가 메이저출판사에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리그(시스템)를 만드는 것이지요.
 
김성신 : 독자들에게는 이미 그런 구분이 없어요. 순문학이라서 선택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한테 재미를 주느냐 심지어는 옆에 있는 사람들이 권하느냐가 중요하거든요. 우리 내부에서도 그것에 대한 인식 자체를 경계 없음으로 가는 게 맞지 않냐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구조를 그렇게 만들어놓고 인식하다 보니까 현장의 작가들도 자꾸 열등감 이런 이야기를 하고. 그러나 지금 작가가 되려는 이십대들은 이미 그러한 장르문학이나 순문학이냐는 구분은 없는 것 같거든요.
 
군인들이 군대에서 휴가를 갈 때면 많은 준비를 한다. 군복에 줄을 잡아 칼같이 다리고, 전투화를 거울처럼 심하게 닦는다. 심지어는 짬밥이 안 되는 병사에게 견장을 달아주며 자존심을 세워주기도 한다. 하지만 다 부질 없는 짓이다. 밖에 나오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일반인들이 보기에 군인은 그저 군인일 뿐이다. 군복에 줄이 열 개가 잡혀 있고 전투화에 빛이 나도 결국 군인일 뿐이다.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구분을 보고 있으면 비슷한 모습이란 생각이다. 따지고 보면 독자는 별 신경도 안 쓰고 관심도 없는 구분인데 우리끼리만 이러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독자는 그저 싸면서 재미있는 책만 바랄 뿐인데 말이다.
 
 
 
┃윤태진 (교보문고 북뉴스)
taejin107@kyobobook.co.kr
영상_김수진 (교보문고 북뉴스)
sujin2017@kyobo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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