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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10. 15년 전, 그 날의 기억

  • 등록일2020.05.15
  • 조회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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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 너도 같이 갈래, 아니면 여기 있을래?
“있을래.” 그리곤 다시 잠에 빠졌다. 언니는 경쾌하게 계단을 내려가 그때까지 깨어 있던 래피와 다른 친구들한테 작별 인사를 했다. 방충망 문이 쉬익 소리를 내며 여름 공기 속으로 열렸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밤새 온기를 품고 있던 보도는 여전히 따뜻했다.
 
내가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모조리 기억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 언니는 그 얘길 딱 한 번만 해줬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그 얘길 할 필요는 없었다.
 
언니는 샌들을 손에 들고 걸었다. 나중에 그날의 일출 시간을 알아본 언니는 자신이 래피네 집을  
5시 직전에 나섰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감청색을 띤 하늘은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집을 나서자마자 돌멩이를 밟는 바람에 언니는 샌들을 다시 신었다. 언니는 이 부분이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했는지 아주 정확하게 묘사를 해주었다. 돌멩이만 안 밟았으면 도망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언니는 갑자기 행복감에 휩싸였다고 했다. 그래서 집에 가는 대신 강에 가서 일출을 볼까 생각했다. 아직 집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이 불쌍하게 느껴졌고, 자기 인생이 그 사람들의 인생보다 더 나으며 활기 넘치는 것 같았다. 언니는 흰색 상자같이 똑같이 생긴 집들이 나선형으로 들어서 있는 공영주택단지를 가로질렀다. 그중 절반은 비어 있었다.
 
그때 어떤 남자가 나타났다. 두 집 사이를 굉장히 빠른 걸음으로 걸어 언니가 있는 길 쪽으로 오고 있었다. 잔디밭을 지날 때 곁눈으로 언니가 그 남자를 보았다. 하지만 언니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고, 언니는 남자가 어딘가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그때 그 남자가 두 집 건너 앞에서 나타났다. 잔디밭을 가로질러 되돌아온 게 분명했다. 이 두 번째 출현에 언니는 안절부절못했다. 집 쪽으로 계속 가야 할지, 아니면 다시 시내를 향해 도망쳐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잔디밭을 계속 내려와 길에 들어섰다. 남자는 언니를 쳐다보지 않았는데, 그때 언니는 남자의 몇 미터 뒤에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남자는 언니와 같은 방향으로 걸으며 점점 멀어졌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5미터쯤 벌어졌을 때, 언니는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 남자가 앞서가고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안심이 되었다. 언니는 뛰지 않기로 했고, 남자의 위치를 볼 수 있다면 그 편이 더 낫겠다고 판단했다.
집까지 남은 거리 내엔 다른 사람들이 언니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집들이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누군가 듣고 밖으로 나올 것이다. 괜히 도망치다가 아무도 없는 주택단지와 시내 사이 벌판에서 잡힐지도 몰랐다.
 
언니는 두 사람 사이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반 블록쯤 걸었다.
남자가 뒤를 돌더니 언니에게 다가왔다. 남자의 걸음걸이가 기이했는데, 앞꿈치로만 바닥을 디딘 채 짧은 보폭으로 걸었기 때문이다. 언니가 남자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언니가 소리를 지르는 사이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헐떡이며 다가왔다.
소리를 지른 것은 남자에게 겁을 줘 쫓아버리려는 의도였다. 전에 들었던 대로, 우리 모두가 들었던 대로 한 행동이었다. 소란을 피워 이목을 끌어서 남자를 곤란하게 만들면, 너를 그냥 내버려둘 것이라는.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남자는 가까이 오자마자 손으로 언니의 목을 움켜쥔 채 넘어뜨렸다. 그러고는 다리를 오므리고 언니 옆에 무릎을 꿇었다. 남자는 한 손으로 언니의 목을 내리 누른 채로 언니의 복부와 가슴과 얼굴을 때렸다. 언니도 남자를 때리고 할퀴었다. 남자가 몸을 충분히 숙였을 때 언니는 남자의 목에 주먹을 날리려 했지만, 남자가 몸을 돌리는 바람에 주먹이 턱 아래로 빗나가고 말았다. 남자는 공중에 뜬 언니의 손을 낚아챈 다음 팔을 부러뜨리고는 무릎으로 눌렀다. 남자가 언니의 머리를 땅바닥에 대고 짓찧자 언니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남자는 언니의 복부와 얼굴을 계속 때리더니 앞꿈치로 일어서서는 언니를 내려다보았다. 언니는 축축해진 머리를 조심스럽게 안고 있었다.
 
언니는 가만히 누워 있으려고 했지만 몸이 멋대로 움직이며 경련하기 시작했다. 발작이 멈추자 기어서 무릎을 꿇은 다음 일어섰다. 땅바닥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래도 일단 뒷걸음질을 쳤다. 돌아서서 걸으면 남자가 짧은 보폭으로 통통거리며 돌아와 또다시 길바닥으로 언니를 넘어뜨릴 터였다.
 
언니는 발을 질질 끌며 길을 건넜다. 부러진 왼팔을 붙잡아 가슴 위에 붙인 채 도망을 치면서도 눈으로는 집들 사이의 공간을 계속 훑었다. 언니 귀에 자신의 숨소리가, 가슴을 방망이질하며 빠르게 호흡하는 소리가 들렸다.
 
 
금요일, 언니의 집에서 일어난 일은 집 밖의 그 어떤 일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길 건너편 교수의 집. 말을 타고 있던 이웃. 느릅나무, 진입로에 있던 차.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마을엔 언니가 살해된 곳에서 2킬로미터도 안 되는 곳에 족히 수십 명은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마을은 마치 눈이라도 내리고 있었던 것처럼 조용했다. 어떤 여자가 책 한 무더기를 들고 도서관에서 나오는 걸 보았다. 제과점 진열창 안에 있는 케이크를 바라보던 남자도 있었다. 옆좌석에 있는 종이 한 뭉치를 들고 밴에서 내리던 마을 일꾼도, 일기예보를 들으면서 비좁은 거리를 따라 운전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마치 마을은 그 상태 그대로인데 언니네 집에만 무언가가 내려앉아 엎어진 것  같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마을은 평온한데 언니에게만 불길한 무언가가 정통으로 떨어졌다.

레이첼의 <!HS>죽음<!HE>으로부터 [소설]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플린 베리 | 작가정신
2020.05.07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대프니 듀 모리에의 정서, 히치콕의 영화적 시선, 폴라 호킨스의 심리적 스릴감이 결합된 페미니즘 스릴러의 신예 플린 베리의 강렬한 데뷔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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