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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6. 그 남자가 복수를 위해 15년을 기다린 걸까요?

  • 등록일2020.05.11
  • 조회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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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나를 본다. 루이스가 멈춘다. 너무 멀어서 얼굴은 흐릿하고, 바람 때문에 넥타이는 꼬여 있는 데다, 바짓자락은 구두 위로 축 늘어져 있다.
 
루이스 경사가 오솔길에 오르는 소리가 들릴 때쯤, 나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나무들 틈으로 발을 들여놓는 경사의 표정에서 내가 바보처럼 보인다는 걸 감지할 수 있다.
나뭇가지가 만든 타원형 액자를 통해 나를 응시하는 경사의 얼굴이 기운 없고 슬퍼 보인다. 아까 차에서는 2년만 더 경찰을 한다고 했지만 지금 당장 그만두고 싶다고 얼굴에 쓰여 있다. 경사 위로 가시나무 가지들이 아치 모양을 이룬다.
경사가 그 나뭇가지 아래로 몸을 숙이더니 무릎을 꿇어 땅바닥을 살핀다. 보나마나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 내가 별것도 아닌 걸 여태껏 지키고 있었다고 생각 하는 건지 궁금하다. 경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돌려 언니네 집을 본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꺾어 만들기라도 한 듯 완벽한 타원형을 이루고 있는 나뭇가지를 통해서.



 
“누군가 언니를 지켜보고 있었어요.내가 말한다.
“노라, 여긴 왜 오신 거죠?”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큰 경사가 내 머리 위 허공에 대고 묻는다.
“집을 보고 싶었어요.
경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절벽 너머를 응시한다. “누군가 언니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나요?
“그건 아니에요.
 
우리는 계곡을, 흰 눈밭에 시커먼 웅덩이를 만들어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본다. 낮에도 이 위에 있으면 아래에선 안 보일 테니, 밤에는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미지의 남자가 언니네 집 주변을 배회하다가 창문에 손을 대는 장면이 상상된다.
 
신발 위부터 머리끝까지 팽팽하게 여며진 과학수사복 차림의 남자가 오솔길을 올라온다. 루이스 경사가 그 남자한테 내가 본 쓰레기를 수거해달라고 부탁한 후, 우리는 함께 산등성이를 내려가기 시작한다. 루이스 경사가 앞에서 눈밭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산등성이 저 너머, 아래 숲에는 사선으로 음영이 쭉 져 있다.
우리는 허둥지둥 암벽을 내려와 방목장 뒤로 빠져나온다. 루이스 경사를 따라 도로로 나가는 동안 눈 속을 터벅터벅 걷다 보니 다리가 무거워진다.
“배 안 고파요?” 경사가 묻는다.
 
 
에메랄드게이트에는 플라스틱 테이블이 있고, 계산대 위에 걸어놓은 여러 가지 요리 사진이 역광 조명을 받고 있다. 주방장용 흰색 조리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튀김기에서 철제 바스켓을 들어 올려 흔든 다음 다시 튀김기에 집어넣는다. 기름 냄새를 맡으니까 입에 침이 고인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게 이틀 전, 런던에 있는 펍에서였다.
 
찻잔 속에서 진주 모양으로 뭉쳐 있던 재스민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몽롱하게 넋을 잃고 바라본다. 얼굴을 받치고 있는 두 주먹 때문에 볼이 눈까지 밀려 올라간다. 루이스 경사가 테이블 아래로 무릎을 밀어 넣는다. 의자에 비해 경사의 몸집이 너무 커 보인다. 나는 아까 가시나무에 긁힌 엄지손가락을 볼에 대고 문지른다.

음식이 카운터 위에 나온다. 루이스 경사는 무슈 팬케이크를 시켰는데, 나도 같은 걸 먹을 예정이다. 결정을 내리는 게 너무 싫어서 같은 메뉴를 골랐다. 이것저것 볶은 건더기를 숟가락으로 떠서 얇은 밀전병에 얹고 삼각형으로 접은 다음 자두 소스에 찍는 동작, 그 리듬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눈송이가 가로등 아래에서 날리는 가운데 우리는 말없이 전병을 접어 입으로 가져간다.
 
“노라, 그 산등성이에는 왜 간 거죠?” 경사가 묻는다.
“말했잖아요, 언니네 집이 보고 싶었다고.
카운터 뒤에서 요리사가 국자로 완탕을 플라스틱 용기에 담고 있다. 짭짤한 육수 냄새가 흘러 우리 자리까지 온다.
“언니가 한 말 중에 거기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말이 있었나요?
“아뇨.” 밀전병 가장자리를 접으며 대답한다. 루이스 경사는 음식을 먹다 말고 나를 지켜보고 있다.
 
“레이첼이 개를 들인 게 언제였죠?” 경사가 묻는다.
5년 전, 말로로 이사 왔을 때요. 그때 언니는 스물 일곱이었어요.” 밀전병을 자두 소스에 찍는다.
“그해에 다른 중요한 일은 안 일어났나요?
“네.
“그런데 저먼셰퍼드를 들였군요.
“그런 사람 많잖아요.
“집에서 서류를 발견했습니다. 그 개는 브리스틀에 있는 경비업체가 키우고 훈련시킨 개였어요.
접시로 향하던 숟가락이 도중에 뚝 멈춘다. “뭐라고요?
“그 업체는 방범용 개를 분양하는 회사고요.
페노가 잔디밭에서 바쁘게 뛰어다니는 동안 언니가 이런 저런 명령을 했던 게 기억난다. 그땐 심심풀이로 페노를 훈련시키는 거라고 했었다. “저한테는 입양했다고 했어요.
“무서워서 그랬을지도 모르죠.” 루이스 경사가 말한다.
“스네이스에서 일어났던 일 때문에.
놈이 일을 마무리했을 즈음 언니는 걸을 수가 없었다. 놈과 사투를 벌이느라 손톱은 모조리 찢겨 있었다.
“그놈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내가 묻는다.
“저도 모릅니다.
“대체 왜 15년이나 기다린 걸까요?
“어디에 있는지 찾느라 그랬을지도요.
 



레이첼의 <!HS>죽음<!HE>으로부터 [소설]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플린 베리 | 작가정신
2020.05.07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대프니 듀 모리에의 정서, 히치콕의 영화적 시선, 폴라 호킨스의 심리적 스릴감이 결합된 페미니즘 스릴러의 신예 플린 베리의 강렬한 데뷔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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