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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원균이 정말 그랬어?: 원균에 대한 오해

  • 등록일2013.08.09
  • 조회 7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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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원균론이나 원균 명장론이 나왔었지요. 독재시절 군부의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해서 이순신 장군을 일부러 띄운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원균을 깔아뭉갰다는 말부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내세우며 원균은 사실 그렇지 않았다는 식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는 사람들이 있었죠.

원균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80년대 이정일 교수의 원균론이 발표되고 나서부터인데 그 이후로 소설 등에서 원균맹장화나 이순신 깎아내리기 반대급부로 써먹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된 인식일 뿐이죠. 한 가지 측면만을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펴다 보니 마치 환단고기(또는 한단고기)를 추종하는 이들처럼 어처구니없는 곳까지 발전하게 된 대표적인 사례 중에 하나입니다.

원균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내려지는 것은 선조실록에서 선조가 원균을 두둔한다거나 원균 사후 일등공신에 추서된 점 그리고 『원균행장록』의 내용에 근거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사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역사를 뒤튼 것이 명백한 경우입니다. 알다시피 원균 사후에 원균이 일등공신으로 추서된 것은 선조가 자신의 실책을 감추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죠. 실제 임란 이후 공신목록을 보면 전장에서 싸운 장수들보다 내시들이 더 높이 추서되어 있기도 합니다. 즉 전란에서 싸운 장수들은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가 될 수 있지만 내시들은 왕의 옆에서 시중드는 쪽이니 두려울 것이 없다는 거죠.
아래는 임란 이후의 공신 목록입니다.
 
호성공신(扈聖功臣) : 선조의 피난 시 호종했던 공로
1등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이항복, 정곤수
2등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 (忠勤貞亮?節協策扈聖功臣): 신성군 이후, 정원군 이부, 이원익, 윤두수, 심우승, 이호민, 윤근수, 유성룡, 김응남, 이산보, 유근, 이충원, 홍진, 이괵, 유영경, 이유징, 박동량, 심대, 박숭원, 정희번, 이광정, 최흥원, 심충겸, 윤자신, 한연, 해훙군 이기, 순의군 이경온, 순령군 이경검, 신잡, 안황,구성
3등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 정탁, 이헌국, 유희림, 이유중, 임발영, 기효복, 최응숙, 최빈, 오정방, 이응순, 신수곤, 송강, 고희, 강곤, 이사공, 유조생, 양순민, 경종지, 최세준, 홍택
내시(內侍): 김기문, 최언준, 민희건, 김봉, 김양보, 안언봉, 박충경, 임우, 김응창, 정한기, 박춘성, 김예정, 김수원, 신응서, 신대용, 김새신, 조구수, 장자검, 백응범, 최윤영, 김준영, 정대길, 김계한, 박몽주, 이사공, 유조생, 양순민, 경종지. 이연록
의관(醫官): 허준, 이공기
이마(理馬): 김응수, 오치운, 전용, 이춘국, 오연, 이희령
86. 그중 내시:24명 이마:6명 의관:2명 별좌:2명 사알:2
 
선무공신(宣武功臣) : 전쟁에서 공을 세웠거나 후방지원에 대한 공로
1등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 이순신, 권율, 원균
2등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 : 신점, 권응수, 김시민, 이정암, 이억기
3등 효충장의선무공신 (效忠仗義宣武功臣) : 정기원, 권협, 유사원, 고언백, 이광악, 조경, 권준, 이순신(李純信), 기효근, 이운룡
18
 
청난공신 (淸難功臣) 임란 중 발생한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공로
1등 분충출기합모적의청난공신 (奮忠出氣合謀迪毅淸難功臣): 홍가신
2등 분충출기적의청 공신 (奮忠出氣迪毅淸難功臣): 박명현, 최호
3등 분충출기청난공신 (奮忠出氣淸難功臣): 신경행, 임득의
5
 
『원균행장록』이라는 서적은 아예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애초에 『원균행장록』은 영조시대 김간이 원균 후손들의 청탁을 받아 쓴 책입니다. 더더구나 원균 당시가 아니라 127년이나 지난 다음에 쓰인 것으로 내용 자체에 오류와 모순을 가진,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는 책이지요. 몇 가지 예를 들어보죠.
 


『원균행장록』에서 1592년 임란발발 당시 이순신에게 출전을 권한 장수는 어영담과 권준이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송희립과 정운이죠. 또 당포해전 당시 원균이 적선 55척을 빼앗고 수급 103두를 거두었다고 했지만 당시 원균이 가진 배는 불과 4척이었고 - 알다시피 개전 초 원균은 싸워보지도 않고 함대를 버리고 도망간 무능력자입니다 - 당시 전체 조선군의 전과가 적선 7척 파괴 수급 95두입니다. 그러니까 조선군 전체가 벤 수급보다 자기 조상 수급이 더 많다는 거짓말을 하는 책인 것이죠.

또한 옥포해전 당시 원균은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했는데 이 해전의 성과를 부풀려 원균의 공을 높이기 위해 실제 26척이 격침된 전과를 100여 척을 침몰시킨 것으로 과장합니다. 게다가 육지에서의 전적도 뻥으로 일관합니다. 『원균행장록』에서 원균은 ‘니탕개의 난’ 당시 공이 커서 부령부사의 자리에 올랐다고 했지만 정작 당시 부령부사는 장의현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결국 『원균행장록』은 후손들이 자기 조상을 위해 만들어놓은 판타지 소설이라는 말이지요. 그 외에는 원균을 옹호하는 것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 나온 원균옹호론이 임란 당시와 조선을 통틀어 나온 것보다 더 많은 것 같군요.

유성룡의 경우 『징비록』에서는 원균을 음험하고 간사한 인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유성룡은 선조 29년에 전쟁 중 선조 앞에서 원균이 몸을 돌보지 않고 싸우며, 수전과 육전 모두에 능하다고 말합니다. 이를 근거로 삼기도 하죠. 그러나 그 선조 27년의 기록을 보면 선조는 이순신을 의심하며 원균을 용장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이순신을 비호하는 유성룡을 고깝게 보며 그의 발언을 의심하고 말이죠. 이런 상황에서 유성룡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선조의 비위를 맞췄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선조로서는 정치적으로 동인을 견제하려던 목적에 서인 쪽의 지지를 받는 원균을 높이 세우려 했고 이에 대한 갈등이 생겼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균을 비난하는 내용들은 어떨까요? 일단 『난중일기』는 빼고 이야기합시다. 『난중일기』가 이순신이 적은 일기라서 객관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말이죠. 『난중일기』까지 포함하면 원균은 정말 기준 이하입니다. 빼도 마찬가지지만요. 일단 선조실록의 선조 25 6 28일 김성일의 장계를 봅시다. 그 장계에 의하면 원균은 일본군이 바다를 건너오자 싸워보지도 않고 전함과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말이 나옵니다. 알다시피 조선에서 공문서 위조는 극형에 처할 중죄였기 때문에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더구나 뒷배경이 좋기로는 이순신보다 원균이죠. 원균은 서인 주류 라인을 타고 있었지만 이순신은 동인 계열이지만 아웃사이더라 그다지 힘이 없었거든요.

동시기 의병을 일으켰던 안방준은 그의 『은봉전서』에서 원균이 수급을 모으는 데만 급급하고 심지어 다른 장수들에게 수급을 구걸까지 하니 병사들이 이를 두고 “한 숟갈씩 얻어온 밥이 온 공기보다 많다”라며 비웃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은봉전서』를 쓴 안방준은 원균과 무슨 원수라도 졌을까요? 천만의 말씀이죠. 오히려 원균과 안방준은 일가였습니다. 『은봉전서』에 보면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친척인 안중홍을 찾아갑니다. 이 안봉준의 처가 바로 원씨 집안 사람이죠. 즉 처가 쪽 친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방문한 자리에서 원균은 높으면서 막중한 책무를 받은 것에 대한 걱정이나 영광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순신을 쫓아낸 것만이 기쁘다고 말합니다. 결국 안중홍은 원균을 두고 조괄과 기겁에 비유하며 졸렬하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원균은 수군이 아닐 때도 비리를 저질렀는데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나서 원균과의 트러블로 이순신이 “나를 내치든지 원균을 내치든지 둘 중에 하나를 골라라.” 하고 엄포를 놓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병사로 빼버리죠. 이것으로도 당시 원균의 평가가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충청병사로 간 자리에서도 원균은 비리를 저지릅니다
.
선조실록 28 8 15일자 기록에 사헌부에서 원균이 씨콩을 받고 복무 기간이 남은 병사들을 군에서 빼주는 병역비리를 저지르고 무리한 형벌로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하였다고 파직해야 한다고 건의합니다. 이때 철원부사 심원해와 봉산 군수 박응인도 함께 비리로 고발됩니다만 선조가 원균만 빼주죠. 왜냐하면 ‘시기 어려우니 그런 장수를 빼면 안 된다’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성은 둘째 치고 그가 정말로 용맹하기라도 한 장수였을까요? 그것도 천만의 말씀입니다. 임란이 끝난 지 2년째 되는 해 윤계선이라는 선비가 『달천몽유록』이라는 소설을 쓰는데 그곳에 원균을 비웃는 글을 적습니다. 그는 그 소설에서 원균을 배가 불룩하고 입은 삐뚤어지고 얼굴빛은 흙빛이라고 말하죠. 이것이 소설이라 믿을 수 없다면 의병장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에 원균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그는 ‘원균이 체구가 비대하고 식사에 밥 한 말, 생선 5마리, 닭이나 꿩 3~4마리를 먹으며 평소에도 배가 무거워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용맹하다 할 수 있을까요? 외모도 외모거니와 묘사된 상황이라면 제 몸 가누기도 힘든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용맹한 무엇이 나올 수 있다면 정말 개가 웃을 일이죠. 그뿐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원균이 육전에서는 용맹한 장수로, 장군감은 아니지만 그래도 잘 싸우는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에도 근거가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어디에도 원균이 전공을 세웠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선조 22 1월과 7, 대신들이 북방에서 전공을 세운 장수들을 비변사에 추천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원균은 이에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이순신은 세 번이나 추천이 되죠.
또한 원균이 종성부사로 있을 때 직급 테스트를 치렀는데 급수가 하급으로 나와 면직된 적도 있었습니다. 조선은 관리의 승진 및 평가가 엄격했는데 상중하로 나뉜 인사고과에서 하급 평가를 받으면 당상관은 파직, 그 이하는 인사고과 2회 기간 동안 승진불가였습니다. 즉 자기 일도 제대로 못해 승진 시험에 떨어지고 면직까지 받은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끈이 장난 아닌지라 불과 6개월 후에 전라좌수사로 승진되어버리죠.

그리고 위에서 말했지만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보이자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간 사실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죠. 1593년 웅천포 해전에서 위기에 처한 아군 상선을 외면한 것도 기억할 만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난 다음 그가 통제사로 오르기 전에 약속했던 대로 부산에 진격하지 않은 것을 두고 현실을 잘 본다는 둥 이순신 쪽이었던 권율이 방해를 놨다는 둥의 말을 하지만 실제 원균이 요구한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습니다.

원균은 수륙합동작전에 육군 30만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당시 조선에 30만의 병력을 만들 여력이 있었으면 전쟁이 그렇게까지 되지도 않았겠지요. 한마디로 되지도 않는 땡깡을 쓰며 전투를 미뤘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전황과 국력을 평가할 기본적인 소양조차 없었다는 소리가 되는 것이지요. 전략을 못 짜면 잘 싸우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는 부산포 출정 중 가덕도에서 물을 구하러 보낸 아군 병사들이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위기에 처하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도망쳐버립니다. 몇몇 사람들은 아군이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도망치는 장수를 용맹한 장수라고 보는 이상한 눈이라도 있는가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몽땅 말아먹고 사라져버린 사실은 원균을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좋게 볼 수가 없는 명백한 사실들의 집합입니다.

살펴보면 당대 기록이나 후대 기록 어디에도 원균을 훌륭한 장수라고 표현한 부분은 없습니다. 심지어 왜란 내내 원균을 두둔하던 선조마저도 이순신 사후 더 이상 원균을 두둔하여 견제할 필요가 없어지자 “나는 그대를 버렸으나, 그대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라는 말로 제문을 내려 위로합니다. 도대체 이런 사람을 시대가 만든 희생양으로 보는 부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도리어 지금의 모습을 보면 시대가 만든 희생양은 이순신입니다.

사람들이 원균맹장론 등으로 ‘어? 정말로 원균은 그런 거야?’라고 생각할까 두렵습니다. 좀 더 많은 분들이 이런 사실에 대해 정확히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원균명장론 따위가 설치는 꼴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요.
 
 
[역사/문화]  조선의 속사정
권우현 | 원고지와만년필
2013.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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